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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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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0 인문까페 창비 11:15 ~ 1:10 

 

 인문까페 창비에서 천명관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가장 먼저와 위치선정을 제대로 한 덕분에 바로 옆에서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셔서 왠지 모르게 더 정이 가더군요. 오, 아버지... 

나이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땀냄새 나는 글을 쓰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천명관 소설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명색히 애독자를 모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 신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완독하지 못한 상태로 자리에 착석했거든요. <봄, 사자의 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까지 부랴부랴 읽었으나 다른 분들이 <우이동의 봄><동백꽃>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얘기하는 데 어려움이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을 뽑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이동의 봄>이 1위로 뽑혔습니다. 천명관 소설가는 이 작품과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실린 <二十歲>와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해주시면서 사람들은 '진전성'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덧붙여주셨습니다. 저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맞닥뜨렸을 때 미학적 보수, 휴머니즘 같은 낡은 서정의 권위에 기댄 개념 어쩌구저쩌구 비판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이윽고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진정성이란 개념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성의 참뜻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진정성. 저는 진정성이 작가라면 당연히 갖춰야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해서 되려 진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이내 기본에 충실하기가 어렵다는 생각까지하지 못한 제 자신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제가 평론가들의 프레임에 많이 갇혀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예술/문학작품을 감상-감각의 대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먼저 바라보진 않았는가. 이런 반성들을 하면서 꿋꿋이 하고자 했던 질문을 꺼내들었습니다. 

 

 배수아 작가가 지향하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가 지워진 소설, 물 흐르듯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근대소설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일부러 타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는 현대소설, 영상과 문학이 은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시대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소설적인 것'에 대한 천명관 소설가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천명관 소설가가 거의 정반대의 소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재밌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다른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소설관을 비교해봄으로써 '소설이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명관 소설가의 답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기질'이었습니다. 배수아 소설가는 제발트, 로베르트 무질 같은 소설가와 기질이 맞기 때문에 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지우는 소설실험을 하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과 기질이 맞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 생각난 이야기는 푸코였나 사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책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독자수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 <말과 사물>이란 어려운 책이 바게트 땅 팔리듯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푸코가 이런 말을 했다고... 또 그러면서 재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소설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인용해주셨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모옌이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이 서사가 강한 작품들을 즐겨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과 그 작가들의 영혼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말을 받아서 박민규 소설가와 천명관 소설가의 영혼이 닮았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게 아닐까요? 물었는데 오히려 박민규 소설가와 자신은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고,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 다음 책 읽는당 모임 때는 박민규 소설가를 초청해주셨으면 ㅜㅜ 가을에 신간 출간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창비에서 출판하시길 ㅜ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단편 쓰는 몸과 장편 쓰는 몸이 어떻게 다른지, <핑크>를 쓰실 때 마감에 쫓겨 3일 만에 쓴 소설이라는데 당신의 친구 분 중에 대리운전하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 '몸무게가 많이 나오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한 소설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평소 단편을 쓰실 때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씨앗 같은 한 문장에서 시작하시는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처럼 칠면조로 싸움을 패는 인상적인 이미지에서 착상해서 작품을 쓰시는지, 초반과 결말을 먼저 쓰시고 작품을 쓰시는지, 작품을 써나가면서 결말을 만드시는지, 정영문 소설가처럼 (김중혁 소설가의 빨간책방 방송에 의하면) 침대에서 구상을 다 하시고 집필에 들어가시는지, 김연수 소설가처럼 (문학동네 팟캐스트 방송에 따르면) 서사와 서사가 충돌시킴으로써 서사가 다른 층위로 점프되는 식으로 끝에 가셔야 결말이 정해지시는지, 아침에 쓰는지 밤에 쓰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사실은 천명관 소설가의 작품을 다 읽어본 다음에 스스로 생각해볼 때 더 의미 있는 질문/답변이 나올 것 같아서 아껴두기로 했습니다, (라고 쓰고 시간이 없었다고 읽는다)


 마지막으로 책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중국소설들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본문학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일본을 동경하고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일제감정기의 기억, 콤플렉스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은 작품에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쓴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 한국이 일본/문화를 동경하는 것처럼, 일본은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키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일본인'이라고.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도 안 읽어봐서 잘 와닿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이 하루키에 대해 말했던 내용들이 생각나면서(대부분 부정적 내용) 어떤 맥락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컴플렉스가 거의 없고, '우아하고 고상한' 맛은 없지만 사람냄새 나는 글을 쓴다고. 허삼관매혈기의 위화, 개구리-붉은 수수밭의 모옌, 쑤퉁... (그러면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 소설가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 김연수 소설가가 번역한 <기다림>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네요 ㅜㅜ)최근 황현산 평론가의 <말과 시간의 깊이>에 수록된 <르네의 바다-김현 론>을 읽으면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한 적 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 그러면서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박민규 작가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창비 팟캐스트 마지막 부분에 했던 말로 기억나는데 침략당하는 피지배자, 약소국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자, 강대국의 국민으로서 문학을 해보고 싶다고(정확한 인용은 아님). 콤플렉스와 박민규 작가의 말이 만나면서 빚어내는 오묘한 물결무늬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여기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


리뷰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통틀어 몇 번의 밭은기침이 나왔을까? 아마 이동진 영화평론가라면 필히 그 숫자를 세워봤을 것이다. 밭은기침. 병이나 버릇으로 소리도 크지 아니하고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으며 자주 하는 기침. 나는 밭은기침의 사전적 정의를 보고 '병든 닭처럼'이란 직유를 떠올렸다. 어딘가 아픈 사람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야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지만 기침을 습관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아픈 느낌을 주는 사람들. 어쩌면 이성복 시인의 시구처럼 모두 병에 걸렸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아픈 줄도 모를 사람들. 천명관 작가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비 책읽는당에서도 추천해줬던 중국문학처럼, 이를 테면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허심관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 잘난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추락하는 비극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보이는 부족한 사람들이 아둥바둥 버티는 희극적인 이야기. 라면국물을 담은 냄비바닥에 종양처럼 남아 있는 검은 조미료 같은, 바닥에 밀착된, 까맣게 타들어간 속내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 


 무엇보다 이야기꾼이란 별명에 걸맞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좋았다. 아마 신간평가단하면서 가독성으로만 따지면 하진의 자유로운 삶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듯 싶었다. 개인적으로 배수아 소설가의 반서사적 소설관 같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쭉쭉 읽히는 소설보다 멈칫하게 만들고, 주저하게 만들고, 몸을 차분하게 만들고, 리듬을 한 템포 혹은 두 템포 낮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있지만 김승옥 소설가가 소설의 abc라고 정의한 바 있는 '재밌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거의 언제나 즐겁다. "봄, 사자의 서"를 제외하곤 막힘 없이 한 번에 내려갈 수 있었다. 김연수 소설가의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 떠오르기도 했던 "파충류의 밤",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혀주신 "우이동의 봄", 특유의 입담과 고래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동백꽃", 박민규 소설가의 "루디"가 떠오르기도 했던 장르소설 "핑크", 봄, 사자의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만 읽은 상태에서 파충류의 밤을 최고의 단편으로 뽑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책읽는당에 참석한 다른 분들처럼 "우이동의 봄"에 마음이 더 갔다. 진정성. 신형철 평론가가 어디선가 보수적 미학관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악용되는 진정성의 용례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했었는데 "우이동의 봄"은 좋은 의미에서 진정성이 있는 작품이라 느꼈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도 어려운 관계인데 할아버지와 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하얗게 날리는 할아버지의 주름 깊은 얼굴 뒤로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듯 서정적 분위기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책읽는당 행사 이후 김미월 소설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스테이크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작업 중이라고. 영화도 기대되지만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리>에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천명관 소설가의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 천명관 소설가 당신은 밭은기침을 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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