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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민음사 패밀리세일 덕으로 밀란 쿤데라 전집의 일부를 소장하게 되었다. 우스운 사랑, 생은 다른 곳에, 소설의 기술을 제외하곤 이미 소장하고 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농담-까지 합쳐 4/5 밀란 쿤데라 전집을 갖게 된 것이다. 당장 읽어야 할 책도 다 읽었고, 지금 당장 천착하고 있는 주제나 관심이 사라져서 무슨 책을 읽을까 책장을 살펴 보던 중 문득 전집을 독파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세계문학전집은 계속 출간되고 있고, 민음사의 경우 300권을 돌파하고 있기에 잘못 건들면 다치는(?) 상황이지만 15권의 밀란 쿤데라 전집, 확실한 동기부여와 고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 찬 독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쿤데라가 세르반테스-발자크-프루스트-카프카-곰브로비치의 자신만의 소설사를 갖고 있듯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보고 싶다는 욕구와 예의 가벼움/무거움의 문제, 에세이를 소설미학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도입한 작품세계의 독창성 등이 미학적으로 윤리적인 소설에 대한 고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장 얇은 <느림>부터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만남>이란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필립 로스에 대한 글이 있어 집중해서 읽었다.
가속되는 역사 속의 사랑. 필립 로스, <욕망의 교수>
글의 일부를 옮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관련된 모든 차원에서 성을 발견한다. 미국에서 소설은 도덕의 전복을 예고하고 동반하는데, 이 전복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1950년대만 해도 인정사정없는 청교도주의 안에서 답답해했는데, 그 후 단 십 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뀐다. 가벼운 첫사랑과 성행위 사이의 방대한 공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감상적인 무인 완충지대는 이제 섹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지 못한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냉혹하게 섹스와 대면하고 있다.
(...)필립 로스에게 있어서 성적 자유는 확실하고 집합적이며 평범하고 불가피하며 코드화된 하나의 주어진 상황에 불과하다. 그것은 극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서정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른다. 이보다 '더 이상'은 없다. 욕망에 반대되는 것은 더 이상 법이나 부모나 인습이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며, 유일한 적은 정체가 드러나고 환상이 깨져 버린 우리 자신의 벗은 몸이다. 필립 로스는 미국적 에로티시즘에 간한 위대한 역사가이다. 아울러 그는 버림받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마주할 때 느끼는 이 기이한 고독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하다.(p45~46)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에브리맨>을 접했을 때 받은 필립 로스에 대한 인상은 '어른'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인생 - 그러니까 소설을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와 씨름하는 소설가, 인생의 스승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생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는 '진실한' 인간. 폴란드계 유대인 미국 작가. 문호는 모르겠지만 거장이란 칭호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붙일 수 있는 작가.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통해 읽은 6권의 소설 중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성찰적인 작품(정서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소년이 온다>?!)
<미국의 목가>를 읽으면서 떠올랐던 작품이 있다. 아니 떠오른 정도가 2중주 수준으로 <미국의 목가> 텍스트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고하게 만든 텍스트.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예술가와 시민> 부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국의 목가>가 특정 설정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예술가의 입장에서 시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가만의 비애와 고통에 대해 설명하면서 타자화된 시민의 자기변호 및 반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올바른 미남과 아름답고 목가적인 미녀, 이들은 <토니오>의 머릿속에서 고뇌 없이, 그늘 없이 양지에서 즐거움을 탐닉하는 장밋빛 인생을 누릴 '승자'로 그려졌지만 <미국의 목가>는 이 건강한 시민의 철저한 전락과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그 몰락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스위드. 리뷰를 쓰기 위해 소설의 첫 장으로 돌아왔을 때 놀랐다. 이 소설이 '스위드'로 시작한다는 것을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이 삼음절은 <롤리타>의 롤리타만큼 마법 같은 단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름은 마법이었다(p.13)'. 이렇게 써놓고 있으니. 시모어 어빙 레보브. 본명은 알아두자. '우리 종족에 태어난 이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은 황금빛인 소년의 얼굴, 턱이 가파르고 왠지 비정해 보이는 그 바이킹 가면 같은 얼굴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정도면 <소나기>의 서울에서 전학 온 소녀보다 이질적이고 낯설었으리라. 가뜩이나 눈에 띄는 이질적인 외모의 스위드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지적 능력은 조금 떨어져보이지만 요즘 널리 쓰이는 '엄친아'라 해도 무방한 시민의 왕이었다.
'레보브 씨는 슬럼에서 자라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교양도 없었던 많은 유대인 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버리지 않고, 이미 열심히 노력해 대학 교육까지 받은 한 세대의 아들들 전체를 계속 몰아붙였다. 이 아버지들에게는 모든 일이 떨쳐낼 수 없는 의무이며, 옳은 길과 그른 길만 있지 그 중간은 없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민 1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거의 없다. 닥치고 돈 버는 것. 그것은 낯선 땅에 불시착한 씨앗이 생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돈균 평론가가 매일경제에 연재하고 있는 <사물의 철학> - 칠판 편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4&no=759162
'`학교`라는 영어단어 `스쿨(school)`은 영어를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할 때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단어였다. 그 단어가 본래 그리스어(Σχολειο)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면서다.
그리스 고전 유산을 이어받아 서양의 문화적 적통이 되려고 했던 로마는 이 단어를 자기들 말로 에콜(ecole)이라고 번역했다. 현재 프랑스어에서 `학교`라고 부르는 그 단어다. 결과적으로 지금 `학교`라는 단어는 영미권에서는 그리스어식 표기로, 프랑스어권에서는 라틴식 표기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라틴어로 번역된 `에콜`은 본래 `여유`라는 뜻이다. 그들은 `학교`를 `여유`라는 일반명사를 이용하여 번역했다. 고대에는 노동하지 않는 계급인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교의 진정한 정신이 일상적 생존 본능과 거리를 두는 정신적 여유, 즉 반성과 성찰 같은 비판적 거리감각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는 대학 등록금이 거의 무료라고 한다. 언제 이런 복지체제가 갖춰졌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68 문화혁명이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좋은 기회가 있어 올해 초 싱가폴에서 한달 정도 체류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 만난 잉글랜드 출신 영어교사에게 68혁명에 대해 물었더니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해서 당황했었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많은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혹은 직장에 취직하기 전에 여행을 떠난다는데 학비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가능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대한민국은? 잘은 모르지만 '학'부모의 영향 아래 있는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정신적 여유를 잃고 살 거라 생각된다.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중학생들도 어느 대학 갈 것인지를 얘기한다고 한다. 사교육 줄인다고 어쩌구저쩌구 해봤자 입시제도 바꾸지 못하면 별 소용없다는 게 필자의 소견이다. '창조경제' 정부가 중시한다고 말하는 '실력'이 무얼 뜻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인터넷으로 손장난하는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다만...
히틀러가 선거에 의해 당선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신적 여유의 부재. 아니 정신의 부재. 히틀러는 민중들에게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무너진 독일경제를 일으켜 세워줄 구세주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대통령.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재밌게도 용산참사로 인해 만들어진 작가선언 6.9은 용산참사를 대한민국판 아우슈비츠라 설명한다. 세월호 시국선언에 '아우슈비츠'가 호명되었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 조르조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가 호명되는 걸 보면 '일인당 국민 소득 3만불 지상주의(일인당 국민 소득 3만불이 되면 유럽식 복지가 가능하고 기타 등등 모든 게 해결되니 그때까지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자는 주의)'에 야만성에 치가 떨리고 토가 쏠린다. 지난 대선 얘기는 굳이 꺼낼 이유도 없지만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호에 실린 김진호 선생님의 글이 흥미로워 잠깐 얘기를 꺼내면 지난 대선은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의 대결구도였다는 것이다. 메시아주의가 마음에 안 들면 이렇게 고쳐도 무방할 것이다. 응답하라, 박정희. 응답하라, 노무현. 의료민영화 얘기가 다시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는데 이 나라 지도층(이라 쓰고 대가리라 읽는다)들은 정녕 국민들의 시체로 자신들의 윤택한 삶을 유지하려는 좀비가 되려 하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직후 한 보수논객이 진보정당이 시체로 장사하려고 한다는 망언을 한 걸 보면 단순히 좌우 대립을 넘어 이 나라에 생명관리정치와 호모 사케르, 목숨/생명과 돈의 교환관계가 무의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우리들의 '스위드'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아버지의 아바타로 자란다. 여기에 제동을 걸거나 방향전환을 할 만한 거리는 없어 보인다. 나는 이를 소극적 운명이라 부르고 싶다.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년기-아동기,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돼도 독립적 주체로 바로 서긴 불가능하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종속돼 있으니까. 스위드의 경우는 그의 인종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더 심했던 것 같다. '뭔가가 이 사람 위에 올라타 정지를 명령한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을 진부함의 표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에게 경고를 한 것이다-너는 어떤 것도 거스르면 안 돼.(p44)' 스위드에게 아버지는 한 사람이 아니다. 레보브를 '스위드'라는 이미지에 가둬놓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대중들, 이들은 아버지의 법의 공동편찬자들이다. 하지만 스위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연기한다. 아니 살아낸다. '스위드 레보브의 삶은, 내가 아는 한, 매우 단순하고 매우 평범했으며, 따라서 딱 미국인의 기질에 맞게 훌륭했다.(p56)' 최근에 유튜브에서 본 허경 선생님의 국립극단 강의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을 소개할까 한다. 아기 때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들의 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공통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는 이들이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사람들보다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들이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완벽하고 아름답게 불어를 구사한다는 것. 전자는 한국에 알게 되면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 간의 괴리가 심화되면서 분열에 이를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된 무지였고, 후자는 주류인 백인들과 다른 피부색으로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이들이 취해야 했던 자세-프랑스인보다 프랑스인답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