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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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리뷰는 아니고, 이 책을 바탕으로 진행된 '반지성주의' 강의에 대한 리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퍼가 아닌 리뷰로 글을 올려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어 글을 올립니다.

 

문제의식 : 지식인과 반지성주의

 

나는 지성사와 문화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데 515일 비교문학문화방법론 특강 반지성주의 세션에서 이택광 교수의 수업을 듣고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연결시켜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본다면 반지성주의는 반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의 결합물로 인식되지만 여기에 항이 하나 더 추가돼야 하는데 바로 자유주의이다. 미국에서 진보는 리버럴이고, 이 리버럴들은 백인 노동자들의 반지성주의로 인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고 반지성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은 반지성주의와 은연중에 공모관계를 맺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면이라 볼 수 있는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지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정초자 중 한 명인 홉스의 저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홉스는 경험과 같은 계열의 심려prudentia를 이성과 같은 계열의 학식(사유)sapientia 위에 위치시킨다.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과 기교를 갖추고 있는것이 중요하지 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책으로 아무리 배워도 실전에서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 대중은 자신보다 뛰어난 역량의 소유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막상 그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반엘리트주의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홉스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주권자를 지지하는 국가주의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반민주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강력한 주권의 필요성을 만인의 평등성에 찾는다는 점, 또 안보를 비롯한 국가의 역할을 뛰어넘는 월권적 권력 오남용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그리스 시대 소피스트들부터 계보가 이어지는데 이들의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정치적 냉소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의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체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본주의를 유일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변혁할 수 있는 래디컬한 사상과 정치운동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앤서니 기든스가 천명한 3의 길부터 중도 실용주의 노선이 우세해졌고, 이 경향은 기존의 정치세력의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준 마크롱의 당선까지 이어지고 있다. 좌파가 몰락한 자리에 극우가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는 소멸되고, ‘사물들의 관리를 행하는 행정만이 남는다.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지성주의는 결국 소피스트부터 영국경험론, 영미철학으로 이어지는 영미철학(바디우 식으로 표현하면 반철학)의 반대급부, 플라톤 전통의 대륙철학, 그중에서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좌파들의 입장이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기긴 했다. 진보적 자유주의 지식인 또한 반지성주의에 기여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수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럴진대 반지성주의의 개념규정이 좀 더 명확하게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주의가 표면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 활동을 통한 지성의 습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고, 이면적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점까지 이해가 되는데 자유주의 체제에 반하지 않는 입장은 모두 반지성주의인지 의문스러웠다. 특히 지성주의를 공산주의와 등치시켰을 때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도그마적인 태도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성주의, 또는 플라톤 계열의 철학(반철학에 반대되는)이 엘리트주의적 측면을 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또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이어지고 일상성과 차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지만 이제는 다시 일반이론과 총체성을 재사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기존의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수용하고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론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를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국한시키지 않고 사민주의나 공산주의를 갱신하고 쇄신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반지성주의할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베처럼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거부하고, 부분적인 사실이나 경험에 기초해 가치나 이념, 지적 담론을 부정하는 태도였다. 확실히 한국에서 반지성주의 집단으로 표상되는 일베의 쾌락의 극단적 평등주의나 모두가 다 속물이고 병신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사고방식, ‘정치적 사실주의를 내세워 팩트 너머의 이념이나 대의, 진실을 부정하는 점을 통찰하는 데 반지성주의는 유효한 관점을 제시한다. ,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데도 있어서도 그렇다. ‘페미니즘은 피해망상증에 가까운 정신병이다같은 원색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한국의 페미니즘은 ~~’라는 식으로 서구의 사상을 그대로 이식해서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나 페미니즘은 필요하지만 메갈리아는 여자일베다라는 식으로 온건하게 제도권 내에서 성 평등의 실현을 지지하되 급진적으로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운동에 있어 맹목적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는 입장도 반지성주의의 관점으로 고찰해볼만한 대상이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자임하는 남성들 중에는 정말이지 페미니즘을 공부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공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노동운동이나 노조, 마르크스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처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부드러운 통치는 가부장제 질서라는 반지성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지성의 목소리를 면역학적으로 부정하는 모양새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가 결여된 주관적인 주장, 자신의 육체성과 비체성을 순수한 정신logos으로 지우지 못한 오물과 같은 것이기에 자아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원천적으로 목소리voice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렇듯 반지성주의는 신자유주의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논의되어야 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를 논하는 것이기에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사실 이택광의 논의에 따르면 반지성주의 안에 이미 내재적 타자로서 맑스주의/공산주의가 자리하고 있지만)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반공주의, 자유주의는 각각 낙태금지법 투쟁에서 제기된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비롯해 소수자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젠더 갈등,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비정규직 양산을 비롯한 노동의 위기와 흙수저 담론에서 제기된 불평등 문제를 포함한 계급 갈등,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담론을 색깔론을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했던 이데올로기 갈등을 조장하는 핵심적인 기제였다. 반지성주의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적인 것의 죽음, 사회 없는 사회의 도래에 따른 문화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시기부터 구축된 모순의 중층구조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논의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김교신, 함석헌, 장준하 등 서북 계열의 월남 지식인들을 한국 보수의 뿌리이자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라고 본 김건우의 작업이나 남한의 근대화와 서구화의 창구였던 기독교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김진호의 작업들을 유심히 지켜본 나로선 앞으로 이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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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리 님. 소식이 없길래 군대 가신 줄 알았는데..
잘 지내시고 계십니까 ?

2017-05-20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