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토요일 3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을 보았습니다.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이 열린 한 갤러리에서 <철의 꿈> 사진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영상이었는데 재생은 안 해놓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배의 모습. 이 이미지에게 저는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4.16 사건의 여파는 아니고 제가 유추해볼 수 있는 철의 꿈, 인간이 철에 투사한 꿈은 세계적 갑부가 철강왕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넘어가면서 국가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철이 굉장히 소중한 재료로 취급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정도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꿈꾸(고 있)는 철을 이 땅에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자전적 이야기인지 픽션인지 모르겠으나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내레이터의 여자친구는 돌연 신의 품으로 가 남자를 버립니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말하는 신보다 더 구체적인 신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으로 자신의 신을 찾아나섭니다. 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돌연 울산의 암각화로 시선을 옮깁니다. 울산의 암각화에는 고래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래. 아, 참 고래의 꿈이란 노래도 있었죠. 암각화를 그린 선조들에게 고래잡이는 19세기~20세기에 대대적으로 이뤄진 '학살' 수준의 포경'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종교적 차원의 의식에 가까웠을 겁니다. Spiritual영적인 사람들은 고래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하고자 노력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벗어난 초월적 영역, 그러니까 신에 대한 외경심에 대해 얘기했던 게 생각납니다. 존재자는 자신을 초과한 거대한 존재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생명은 이 광대무변의 우주에서 잉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의 삶은 단순한 유기체적 생명의 소멸과정이 아니라 예정된 죽음 속에서, 살아 있는 현재와 도래할 죽음의 미래 사이 긴장 속에서 어떤 빛이 커튼 사이로 살며시 들어오듯 현현하기도 하는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말한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 정신의 영원성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고래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큰 배를 직접 만들어냈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외경심도 자연히 사라졌습니다. 70년대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숭배하게 됐다고 감독은 말합니다. 철 - 자본. 잃은 나라를 되찾자마자 강대국에 의해 양쪽으로 찢어지고 전쟁으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비운의 민족, 무엇보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우리도) '잘 살아보세'를 가슴에 품고 죽어라 일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실제로 죽었습니다. '잘' 살아보고자 한 몸 바쳐 일했는데 돌아온 것은 '살' 조건의 박탈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고공 크레인 위에 올라가 시위를 했고, 이 고공시위는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아주 중요한 시위로 기록되었고, 이후로도 중요한 시위에서 고공시위가 행해졌다고 감독은 설명했습니다(용산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울산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예전보다 돈은 많이 벌지만 작업환경이 굉장히 삭막해졌다고. 회식을 제외하곤 거의 교류가 없을 만큼 개인주의가 심해졌다고. 조금 부족하고 배고팠지만 마음은 따듯했던 옛날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내면적으로 빈곤한 지금을 비교해 현재를 비판할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단, '숨'이 없는 기계들에 둘러싸여 노동하는 삶에 대해 상상해보게 됐습니다. 내 안의 작은 뭔가가 더 이상 숨쉬지 못해 죽어갈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어떤 인터뷰 중에서 감성의 결핍, 부재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지긴 했으나 백낙청 선생님의 지적대로 정치적으로 근대화가 완전히 이뤄졌다고 보기 힘든데 반해 산업화는 완성돼 이성, 합리로 대표되는 기계 속에서 감성이 박멸(?)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무실에 있던 난 같은 식물들의 입사귀를 만 원짜리의 이미지로 읽었다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요? 어쨌든 제겐 그 식물들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에서 가져다 쓰는 인문정신 없는 인문학, 자기계발식 인문학처럼.
어느 장례식장의 연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업 회장이나 간부급으로 보이는 노인이 정주영 회장으로 추정되는 고인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숱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국가발전과 산업진흥을 위해 바친 자신과 회장의 청춘과 영웅적 성취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애틋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일본어식 표현을 하자면 우리는 연민적 존재니까요. 위로받을 수, 위로'당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고독과 상처를 안고 있는 인간들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추해보이고, 때로 추악해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고독과 고통에 대한 댓가이자 결과라고 생각되는 사회적 성취가 대단한 만큼 자신의 고독과 고통을 남들의 것보다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나르시시즘의 다른 얼굴)에 빠져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자기기만적 무지도 한몫 할 겁니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불가능은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이 아니었다고. 한강의 기적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불가능과 기적이 본래적 의미에서 성립이 되려면 노동자, 약자들의 죽음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 이뤄졌어야 할 겁니다. 이건 정말로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뤄지면 기적인 거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걸 기적이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는 한 이뤄낼 수 없는 성과를 죽음 없이 이뤄냈을 때 온당한 의미에서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도정일 선생님이 낸 산문집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자는 내용의 글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는 자기가 쓴 자서전보다 타인이 쓰는 평전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신의 세계, 신화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연아 신화 이후 많은 소녀들이 제2의 김연아를 꿈꾸고 피겨 스케이트를 신었고, 손연재 이후 많은 소녀들이 제2의 손연재를 꿈꾸며 리듬체조복을 입고 있으며, 입을 겁니다. 많은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입히고, 입힐 겁니다. 이 욕망의 촉발이 불가항력적이란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연에 외경심을 가져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인간을 몰락으로 이끌지도 모르는 욕망이 사방에도 회오리치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사업 1위 국가의 위용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선박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배는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포스코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공장이 굉장히 거대했다는 인상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에선 경제성장이 하나의 거대서사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트리클 다운 효과처럼 자연히 민생이 안정될 거라는 소문. 이 거대서사가 허구임을 4.16 세월호 사건을 통해 '실재'가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지적 시점의 권력자들은 서사를 조작해 서사의 개연성, 그러니까 이것이 국가라는 것, 심지어 민주주의 공화국이란 문자상의 진실을 지켜냈습니다. 예술이 이 개연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완고한 현실의 균열을 일으키는 걸 넘어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이런 사고방식 역시 아직 거대서사의 신화에서 깨지 못한 잠꼬대일까요?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 진은영 시인의 <시의 아토포스>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해야 겠습니다.
'철'의 의미는 생각보다 다양했습니다. 물론 영화의 철은 iron입니다만, 철에는 제철할 때 사용되는 계절을 나타내는 철, 철 좀 들어라 할 때 사용되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란 뜻의 철, 여러 장의 문서 따위를 한데 모아 꿰매다 할 때 어근인 철(하다), ‘징(신의 가죽 창이나 말굽ㆍ쇠굽 따위에 박는, 대가리가 크고 넓으며 길이가 짧은 쇠못)’의 방언(함경)인 철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곡선의 철의 이미지를 떠올려 봤습니다. 자기 신념/신조를 지키되 시대의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춘 철이 철철 넘치는 철. 철철철.
돌고래의 영법에 가장 가까운 건 역시 접영butterfly일까요? 이 사랑스러운 바다나비를 철창 없는 감옥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힘쓴 최재천 교수님과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말로 이 글로 마무리합니다. 물론 좋은 영화 만들어주신 박경근 감독님께도~
p.s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박경근 감독의 청계천 메들리와 철의 꿈을 상영하고 있으니 일시 잘 확인하고 가셔서 영화 보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