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개정판
정혜윤 지음 / 녹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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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책입니다. 몇 장을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속도가 느려집니다. 문장 사이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말을 쓰고, 또 얼마나 빨리 의미를 소모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보다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었던 순간들이 책장 사이에서 조용히 되짚어집니다.


작가는 언어를 장식이나 표현의 기술로 다루지 않습니다. 언어를 삶의 조건으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언어가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라는 고백은 낭만적인 희망이 아니라, 오래 듣고 오래 머문 끝에 얻은 확신처럼 읽힙니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는 믿음은, 이 책의 문장들을 하나로 묶는 단단한 중심축입니다.


읽는 동안 특히 오래 머물게 되는 지점은, 이 책이 끊임없이 고유성을 호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하나의 형식과 하나의 속도로 밀어 넣을수록, 저자는 오히려 우리 안에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무엇, ‘살아 있는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이 언어는 자기계발의 문법과도, 냉소적인 현실 인식과도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정혜윤의 문장은 언제나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속도보다 온기로, 성취보다 감각으로 읽는 이를 이끕니다.


이 책이 오래 남는 또 하나의 이유는, 행복에 대한 정의가 놀랄 만큼 소박하면서도 깊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따뜻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문장은,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일상의 기준을 조용히 바꿔 놓습니다. 성공이나 효율이 아니라, 함께 있음과 체온을 행복의 중심에 놓는 시선은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고, 관계의 온도를 다시 느끼게 합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계속 말을 겁니다. “현실의 다른 측면을 봐봐. 다른 쪽으로 가봐.” 이 문장은 도피의 권유가 아니라, 시선의 윤리에 대한 요청처럼 들립니다. 어둠 속에 있는 목소리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에 빛을 비추는 일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책임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여러 장면을 통해 그 소중한 소명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희망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계에는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와 잔인함이 있다는 진단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우리의 말과 의미가 다시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우리가 말을 공유하고 있다니”라고 감탄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조용히 소망합니다. 이 희망은 크지 않기에 오히려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읽고 나서 무엇을 하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말할 것인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 있는 이야기를 지켜낼 것인가를 묻습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말 앞에서 조금 더 신중해지고, 사람 앞에서 조금 더 따뜻해지고 싶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변화만으로도, 이 책은 이미 제 몫을 다 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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