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이 하는 일
오지은 지음 / 위고 / 2022년 5월
평점 :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같지만, 사실은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일지도 모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용기가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지은 작가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로 만들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이 말에서 이미 그의 글이 지닌 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에세이를 “용감한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아도, 오히려 일상적이고 소박한 문장 속에서 삶의 진실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글은 결국 오래 바라본 끝에 태어납니다. 그것이 아프든, 모호하든, 버겁든, 삶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비로소 글이 된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오래 붙든 주제는 ‘역할’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역할이 있었고, 그 역할의 허용 범위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넓은 범위의 캐릭터가 허락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라는 구절은, 우리가 사회라는 무대에서 각자 맡은 역할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역할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에 따른 피드백 또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참 묵직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폭은 어디까지일까?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내려놓은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단순히 역할의 무게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우리가 겪는 불편함과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삶의 가장 아픈 부분도 피하지 않고 드러내는 용기를 만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을 용기가 있어서 죽는 게 아니다. 그만 얻어맞고 싶어서, 이제 다 그만두고 싶어서 내려놓는 것이다.” 흔히 가볍게 던져지는 말 -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열심히 살지” -에 대한 차분한 반박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길 한가운데 샌드백처럼 서 있는 일과 같다는 비유는, 듣는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이 고백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을 향한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그 마음의 고단함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선. 아픔을 미화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그대로 마주하는 용기가 글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뼈 깊이 스며드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시선이 ‘아이들’과 ‘다음 세대’로 향합니다. “아이들은 작은 종이를 쥐고 지뢰밭에 뛰어든다. 어설픈 어른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혀는 차지 말아야 할 텐데.” 이 말은 어른으로서 느끼는 무력감과 동시에, 그래도 함께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고, 여전히 가시밭길을 걷는 이들이 있지만, 그 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고백은 잔잔한 존경과 책임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화려한 주장이나 단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흘러가는 문장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바라보게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마음의 무늬들을 드러내는 글. 그것이 이 책의 힘입니다.
읽으면서 계속 마음에 머물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 아픈 마음도, 모호한 역할도, 흔들리는 순간도, 회피하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글이 되고, 또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는 일』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피했던 마음의 자리를 마주하도록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오래 곱씹게 되는 말들이 제 안에 남아, 지금도 천천히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