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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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가령 판사는 법을, 의사는 생명을, 목사는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이 지켜져야 마땅합니다. 공간과 시간에는 대부분 목적이 있습니다. 우선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한 원칙들이 무너진다면 존재의 이유 또한 사라집니다.



조금씩 원칙이 무너질 때, 매우 사소한 것이니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미 오랜 시간을 그러했다는 관행은 우리를 무뎌지게 만듭니다. 혹은 이미 형성된 사회 질서를 균열 시킬 때 발생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현재의 힘겨운 상황 앞에 침묵을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작은 것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나쳤던 작은 일상에 깊은 사랑이 묻어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으로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서 우렁찬 외침이 됩니다. 손잡고 안아줘야 할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작은 몸부림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사건과 인물을 묘사하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여백으로 인해 우리는 동일한 작품에서 수많은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로 울려 퍼집니다.



『맡겨진 소녀』 이후 11년 만에 출간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랜 기다림만큼이나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긴 설명이나 구구절절 감정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숨겨놓은 등장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은 그들의 짧은 말이나 손짓을 통해 조금씩 우리에게 밀려들어옵니다.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있었던 은폐와 감금, 감제 노역의 실제 사건은 키건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국가의 자금을 지원받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들의 악행을 숨기며, 오히려 그 지역에서 폭넓은 권력을 행사했던 모자 보호소.



흩어지고 사라진 기록들만큼이나 그 안에서 고통당했을 3만 명의 여성들은 제대로 된 사과 한번 받지 못한 채 기억 저편에 머물 뿐입니다. 모자 보호소를 관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고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목도하는 불의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주 소소한 우리의 일상을 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위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과 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힘겨움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인 '빌 펄롱'을 통해 희망 또한 발견합니다. 끊임없는 자책과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의 싸움 이후에 그는 평범한 일상을 뒤로합니다. 모두가 눈치 주고 자신의 일상이 위협받을 수 있음에도 그는 사랑을 택합니다. 그가 받은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작은 일상은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가능합니다. 거창한 무엇은 아니었지만, 끊임없는 사랑이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손길과 몸짓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하여 우리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을 인간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말합니다. 사랑과 정의가 무슨 힘이 있냐고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결국 우리를 이끌었던 힘은 사랑이었음을요.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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