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아름다움은 즉각적인 현현(incarnation)을 추구합니다

웅변술에서는 형식과 언어와 표현이 전적으로 내용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단 하나의 모델을 채택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대중 연설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각각은 자신만의 연설의 [종류]를 소유합니다.

삶은 목가적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투쟁입니다. 씨앗 형태로, 재능으로 행하는 훌륭하고 적절한 하나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조잡함과 진부함과 사소함을 정복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직됨과 기만과 꾸밈과 부자연스러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유일하게 우리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연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분리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단련하는 일에는 전적으로 소홀히 하면서 그저 일어나서 자신의 말에만 집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며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연설은 이러한 총체적인 품위를 대중 앞에서 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특정한 정황 속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상생활에서, 사회 활동에서,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그러한 작은 훈련으로도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대중 연설은 단순히 우리 몸의 한 부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대중 연설은 음성이나 몸짓이 아니라 우리 전 존재를 차지합니다.

설교의 권리와 필요성은 육체와 영혼의 긴밀한 연합과 내면과 외면의 조화에 기초합니다

연설의 내용과 그 제시 사이에는 바로 이러한 친밀한 조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영혼, 화법과 목소리, 말과 몸짓,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와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우리 전 영혼과 육체를 통해, 우리의 온 힘을 다해 말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음성의 색조, 각각의 몸짓, 손의 움직임, 눈동자의 응시는 각각 그 고유의 표현과 능력이 있습니다.

웅변술이란 전인격을 통해 생산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황금률은 "현재의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그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말씀 사역자는 평민이나 그저 저속한 사람들(vulgus)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앞과 주님의 기업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영혼에서 이런 우월한 생각을 막아야 합니다.

사람의 전 존재와 관계하는 설교에서, 음성은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좋은 목소리는 귀한 선물입니다.

연설가가 명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가졌다면 이에 비교될 수 있는 다른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훌륭한 악기입니다. 그것을 잘 연주하고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틀리게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틀리게 말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최고의 예술은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제어하며, 자신의 영혼 전체와 정서의 모든 의미를 듬뿍 담아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마음과 언어만큼이나 풍성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최상의 음악입니다.

자연 전체에,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할 수 없는 음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리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산의 강물처럼 세차게, 개울처럼 졸졸 흐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이 목소리라는 음악은 반드시 우리 몸 전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설교에서 그 어떤 부분도 중요하지 않은 측면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고유의 언어를 지닙니다.

입술의 언어가 있고 눈의 언어가 있으며, 손의 언어, 머리의 언어, 몸의 언어가 있습니다.

영혼의 각각의 정서는 마치 거울처럼 눈에 비칩니다. 사랑과 증오, 경멸과 동정, 우정과 분노, 신뢰와 두려움, 그리고 모든 다른 열정들을 사람의 눈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쁠 때 빛나고 슬플 때 희미해집니다.

청중들은 연설가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단순히 소리로만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면서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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