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전도서는 신약의 빈 무덤에 해당한다. 빈 무덤, 정경의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위대한 ‘아니오’의 경험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할 필요 없는, 사실 할 수 없는 일을 표상한다.
나는 하나님을 돌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스스로 돌보신다
나는 그분을 관리하거나 방어하거나 그분께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은 곧 이제 나는 집으로 가 내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명령을 받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그리고 목회자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은 전혀 복음의 일부가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 짐을 엄청나게 많이 짊어지고 다닌다
우리는 신앙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그것에 대해 번민한다. 그것과 씨름한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빈 무덤은 그런 태도에 반대하는 순간이다.
거짓된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그분을 마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분의 유효성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가 창조주 앞에 조아리는 피조물의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대하는 이방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은 권위 있는 치유와 가르침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통제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극단적이었기에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상황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예수님이 그런 곤경에 처하셨으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향유를 바르고 슬퍼하고 방어하는 행동을 통해 그분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헬렛은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라고 말한다(12:13).
어떤 신약에는 마지막에 시편이 덧붙여져 있다. 시편은 결론으로서 너무나도 적합하다. 시편은 찬양과 간구, 믿음과 회의를 통해 은총의 경험을 우리 삶에 결합시킨다.
시편은 정직한 고백을 통해 감사와 갈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진 사람은 시편이 여러 방식으로 인격적 친밀함을 길러주고, 이로써 우리 믿음을 "아침마다 새롭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회자는 개인적 갱신과 목회 사역 모두를 위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시편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이 신약에 대한 적합한 결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서는 적합한 서문이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오해와 너무나도 많은 어리석은 감정,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요구를 가지고 있어서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그 실질적인 약속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종교라고 생각하는 내부의 소음과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산만한 경건을 버리게 만든다. 그는 잔뜩 쌓여 있는 종교적인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신앙으로 가장한 속임수를 내쫓는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코헬렛의 헤벨(hebel, 헛됨)을 신약 서문으로 삼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들리지 않게 만드는 혼란과 기만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목회적 지침을 제공한다.
"한 통에 두 종류의 음료수를 동시에 담을 수는 없다. 만약 통에 포도주를 담고자 한다면, 먼저 그 안의 물을 따라내고 통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따라내거나 내다버려야 한다."
모든 목회 사역은 교회, 즉 신앙 공동체라는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목회자는 결코 개인들을 섬기는 사적인 종교 전문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결코 군중을 상대하는 비인격적 연설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공동체에 자리 잡고 그 공동체를 세우는 책무를 맡고 있다.
목회 사역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인간성을 성취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목회자는 그들을 단세포적 유기체가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 바라본다.
인간은 관계 속의 개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부인할 때조차도, 공동체를 모를 때조차도 언제나 공동체의 일부다.
회중(카할)은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작동 단위였다. 그들의 법적 체계에서 최악의 처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추방당해 혼자서 살아가야 할 때 개인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무리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 그들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인 것처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우주 안의 고독한 단자처럼 대하는 목회 사역에서는, 그들을 성서에서 인정하는 인격체에 미치는 못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성경적 인간관은 공동체 안의 인격체, "하나님의 백성"이다.
상자 안의 자갈처럼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확장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을 강조하는 미국적 경향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성경적 전통 사이에서 목회 사역은 단일한 개인들이 아니라 ‘백성’을 다루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인적 인격체들을 구속하는 복음의 통전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개인주의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명백한 사실은, 신앙 공동체, 즉 교회는 매우 전문화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특한 공동체다. 교회와 비슷한 조직은 없다. 어떤 유비나 유사한 경험도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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