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헬렛을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전통 속에 위치시킬 때 그의 목회적 중요성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흐름-제사장, 예언자, 현자-속에 자리 잡고 있다("…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줄 예언자가 있다"[렘 18:18]).
(이른 시기의) 잠언과(늦은 시기의) 집회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가 건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자리한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지혜의 타락에 대해 항의한다.
현자들이 입을 닫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욥기는 지혜를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지혜 운동 안에서 쓰였다. 이 책이 거부하는 것은 상투적인 글귀로 축소된 지혜, 성공 이야기로 선전하는 지혜다.
전도서는 "제자리를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12:9)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교사와 율법학자로서 자신의 일에 임했다.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의 신앙고백적 기초-신명기의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선포하고 순종하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마음은 영원과 맞닿아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알고자 애쓴다. 그런 마음은 단순한 대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대답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타자이시다. 기적은 하나님께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식으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차원이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신-자유롭게 새로운 일을 하시는-분이라고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적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라는 결정론적 창조에 구속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우주적인 기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 자유로우시다.
목회자는 기적을 행하시는-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길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북돋는 동시에 기적 자체에 대한 믿음-즉,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분리된 채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하는 어려운 책무를 맡고 있다.
정말로 기적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기적의 기능은 현실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존을 그 본질에 따라 바라보고, 우리가 큰 그림이라고 여겼던 표층적 일상의 이면을 보며, 감각 자료에 대한 우리의 완고한 고집이나 우리의 둔한 믿음 때문에 감춰져 있던 것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게 하고, 우리 삶을 인격적 사랑의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궤도 안으로 점점 더 이끌려 들어가게 한다.
이사異事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헌신했던 이스라엘 역시 모든 기적의 세속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겸손한 신뢰, 순종의 예배)는 그들의 예배에서 인간이 신께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삼는 모든 마술적 행위를 배제함으로써 보존되었다
전도서에서는 기적을 조달하는 이들(마술사, 신접하는 자, 점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모든 얼빠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거부를 통해 그런 마술적 행위를 효과적으로 미리 차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떤 능력을 얻어 친구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으로 우리를 영원히 감동시키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리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간다.
야훼 신앙은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 예배 형태였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호소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인간의 합리적 지성이 각성되었다.
야훼 신앙에서는 무언가-사람들에게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말-를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제사장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자와 함께 일했으며, 예언자적 말씀이 성전 예배와 결합되었다. 이스라엘이 성숙했을 때는 예언자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예배를 지배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절대로 부차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배는 인간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종교를 참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예배는 개인적, 영적, 민족적 삶을 사로잡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매개체로서 삶의 물질적인 측면(건물과 몸)까지 하나로 모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예배를 시작하고 통제했지만, 감각을 통한 참여도 배제되지 않았다.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신체적인 동작도 포함되었다. 거룩한 춤과 교창交唱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표현했다.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한 부분이었다. 그 어떤 행위도 그저 감각적 경험만을 위해 행하는 것은 없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경적 자료와 예전적 역사 속에서 예배는 개인이 경험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관계없이, 혹은 느낌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언가다.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생겨난다.
이스라엘과 교회에서는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씀은 권위 있고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고 그에 대해 순종을 요구하셨다. 예배는 그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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