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삶의 공공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말의 의미와 영향력은 이례적인 방식으로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 설교자들이 더 많습니다.
교회의 번영과 회중들의 모임에 이런 현상이 엄청난 위험이 된다는 것은 모순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쇄된 글이나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회중으로 모인 모임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말씀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삶과 가족과 사회에 주어지는 복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언약의 인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 죄의 용서 그리고 영생의 원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다른 그 어떤 모임도 이 자리를 대체하거나 그 모임의 상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우리 시대에, 주어진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룩한 부르심이 복음 선포를 위해 허락된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모든 단순성과 진리와 권세가 자신들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양심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멋진 장식과 효과적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진실하고 아름답고 부요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복음을 제시하고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충실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이 무기들을 숙련되게 사용한다면, 여러분의 능력은 배가될 것이고 영향력은 더 광범위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관계된 다른 모든 은사들은 더 강력하고 열정적인 표현으로 제시될 때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종 즉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이름은 매우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성경은 혀와 말의 거룩한 사용에 대한 의무를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말하기를 잘 하는 것은 단순히 강단이나 법정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사회적 품행에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연신론을 직접적으로 배격하고, 처음부터 만물의 원리를 맹목적인 충동의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라, 자의식적이며 인격적이며 독립적인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소유하신 지혜를 통하여, 곧 만물의 첫 열매(prwtotocoj thj ctisewj)이신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재창조하십니다.
이 절대적이며 신적이며 근원적인 말씀의 능력을 보십시오. 다른 모든 말에서 나타나는 능력은 이 말씀에서 비롯되며, 바로 그 안에 이 능력의 기원과 형상이 있습니다.
말씀이 모든 피조물 중에 맏아들이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에 걸쳐 어떤 특정한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물에는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사상과 언어와 음성과 소리가 있습니다.
만물이 말을 합니다. 각각의 피조물들은 그 고유의 언어와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웅변적(eloquent)입니다. 죄는 그 노래의 유일한 불협화음입니다.
인간이 피조 세계의 대표자이기에 피조적 언어의 정점은 인간에게서 발견됩니다. 만물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그[인간]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특히 그의 언어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이요 빛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칼이나 폭력보다 강력한 힘입니다
말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상징도, 상투적인 소리도, 헛된 예술 작품도 아니요, 적극적인 이해를 통해 "수고롭고 부지런히" 추구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모든 생물들처럼 살아있고 열망하며 정화되고 성장하며 퇴보하고 아프며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그의 존재 자체로부터 발생한 것이지, 아리안주의(Arianism)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의지로 인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 곧 가장 깊고 내밀한 그의 존재를 보게 됩니다.
말을 통해 사람은 빛으로 발을 들여놓고 은밀함과 침묵에서 나와 자신을 나타냅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서가 형성되고 산관(birth canal)의 어둠 속에서 영과 혼의 자녀가 출생합니다.
이 무익하고, 무가치하며, 쇠약한 말, 곧 이 공허한 말(cenoi logoi)에 반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모든 무익한 말을 해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선호는 곧 거짓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존재와 반대되는 것을 향한 사랑, 곧 공허한 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거짓말은 사탄적입니다.
무익한 말의 근원은. 인간이 형식도 공허한 무도 다 탈피한 채 그저 표면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데 있습니다.
말을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온전히 존재해야 합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웅변의 근원은 논리적인 지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의 행동이나 결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의 마음에 있으며 생명이 흘러나오는 그의 정신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웅변의 생명입니다.
"위대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Les grandes pensees viennent du coeur)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말에 임하게 되면 웅변이 태어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감동을 받고 영혼의 생명의 파동이 너울거린다면, 우리 정신이 이끌려 활기를 띄며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면, 잠겨 있던 진정한 웅변술의 근원이 우리 안에서 열리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고 아연실색하는 그것이 바로 영혼의 감수성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웅변술의 창조를 위해서는 강력한 감정 상태, 감동 받은 정신, 감명 받은 마음,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부인할 수 없는 충동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서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권위 있는 자로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웅변적이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의한 것이며, 고찰이나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 통한 것이고, 사람의 부름이 아니라 신적 권위(droit divin)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웅변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본성이었고, 예술이라기보다는 은사였습니다.
여전히 웅변술은 단지 하나의 은사로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예술입니다.
성경 말씀에 관한 한, 은사는 어떤 영역에서도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기술을 요구하고 필요로 합니다
재능은 웅변을 탄생시키거나 그 흐름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기쁨의 강으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웅변은 "열정적인 이성"(la raison passionnee)이라고 올바르게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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