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는 공동체적이다. 고통은 공동체의 행위가 된다.

(3장처럼) 개인적인 요소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탄원시 안으로 통합된다. 이는 애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성경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울 때 친구들과 더불어 울었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목회 사역의 전략 중 하나는 개인적인 슬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공동체가 더불어 나누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성경적 방식은 개인적인 것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초래된 고통은 한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 고통을 애도하는 것 역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회중의 몫이다.

개인적인 슬픔이 공동체적인 애도로 통합될 때 몇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는, 고통당하는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와 함께 울 때, 고통은 나의 하찮은 약함이나 이기적 상실감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 공동체는 눈물을 통해 그 고통이 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준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참여는 인간적인 환경을 보장해준다.

완고함이나 위선 때문에 홀로 슬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인격화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저 폭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인간적 공동체로서의 독특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일에 참여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다.

공동체는 애도에 참여할 때 상실을 표현하는 행위를 인준한다.

감정을 쏟아내는 행위는 감정의 정화淨化와 갱신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당화된다

목회 사역이 사적인 위로와 개인적인 위무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웃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며 회중이 모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고통당하는 이들은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애도와 항의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

그런 시기에 공동체적 애도라는 정해진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형적으로 이런저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고통을 당하신 그분과 하나가 된다.

고통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목회 사역을 행할 때 집과 예배당 사이에 난 길을 부지런히 오간다. 개인적으로 쏟아내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예배당으로 가지고 들어와 공동체의 슬픔의 일부가 되게 하며, 그것을 십자가 아래에 놓아 모든 속죄의 신학이 제시하는 구원의 능력에 내어맡긴다.

애가는 공동체적이다. 고통은 공동체의 행위가 된다.

(3장처럼) 개인적인 요소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탄원시 안으로 통합된다. 이는 애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성경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울 때 친구들과 더불어 울었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목회 사역의 전략 중 하나는 개인적인 슬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공동체가 더불어 나누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성경적 방식은 개인적인 것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초래된 고통은 한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었으며, 그 고통을 애도하는 것 역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회중의 몫이다.

개인적인 슬픔이 공동체적인 애도로 통합될 때 몇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는, 고통당하는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와 함께 울 때, 고통은 나의 하찮은 약함이나 이기적 상실감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정당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 공동체는 눈물을 통해 그 고통이 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준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참여는 인간적인 환경을 보장해준다.

완고함이나 위선 때문에 홀로 슬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비인격화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저 폭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인간적 공동체로서의 독특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일에 참여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다.

공동체는 애도에 참여할 때 상실을 표현하는 행위를 인준한다.

감정을 쏟아내는 행위는 감정의 정화淨化와 갱신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당화된다

목회 사역이 사적인 위로와 개인적인 위무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웃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며 회중이 모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고통당하는 이들은 도저히 혼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애도와 항의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

그런 시기에 공동체적 애도라는 정해진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형적으로 이런저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고통을 당하신 그분과 하나가 된다.

고통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목회 사역을 행할 때 집과 예배당 사이에 난 길을 부지런히 오간다. 개인적으로 쏟아내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예배당으로 가지고 들어와 공동체의 슬픔의 일부가 되게 하며, 그것을 십자가 아래에 놓아 모든 속죄의 신학이 제시하는 구원의 능력에 내어맡긴다.

그 순간에 만약 누군가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그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함께 나눠준다면-우리를 있는 그대로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를 존중하고 있음을 표한다면-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상실과 상처에 관한 최악의 감정은 그로 인한 외로움과 거절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상실은 행복한 설교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애가는 미숙한 위로를 막아주며,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렘 6:14-옮긴이) 것을 막아주는 보험이다.

멸망의 때에는 구급약 같은 위로로 심판의 상처를 덮으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심판의 고통과 진지하게 씨름하지 않는다면 위로가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치유자, 모든 목회자는 미숙한 위로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애가를 익힌 목회자는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는 사역에서 느긋하게 일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답관체 시는 서둘러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여유 속에서 인내심을 기를 기회를 얻고, 그 인내심으로 고통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에 일종의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폐허가 재앙이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는 더 이상 폐허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치유하려고 할 때는 서두를 수 없다.

애가에서 고통은 피해야 할 불길한 재앙이 아니라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할 치유의 과정이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치스러운 죄, 우리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이런 태도로 다룰 때 구속의 온전함이 삶 전체에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경건을 더럽히는 죄를 뜯어내시고, 사귐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 받아 마땅한 죄를 구속하신다.

애가의 대부분은 비탄시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비탄시의 한가운데에 빛이 깃든다. 고통의 혼돈이 물러가고, 피조물의 모습 속에 구원의 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길을 내어준다.

고통이라는 혼돈과 어둠은 세상 첫날의 빛이 된다. "야훼의 자비는 끝이 없고, 그분의 긍휼은 다함이 없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로우며, 주님의 신실하심이 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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