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의 답관체 형식은 작은 고통 하나하나에 공감하는 동시에 그 고통의 끝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는 목회 사역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답관체 형식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게 해주지만, 동시에 반복의 한계를 설정해준다.

만약 악에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다.

모든 심각한 불안과 질병, 상처, 상실은 당하는 그 순간에는 영원히 계속되고 끝없이 악화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치유나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삶이 끝나거나 고통이 끝날 그 시간이 올 것이다.

애가는 고통을 답관체 형식 안에 담아냄으로써 고통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다루는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애가의 답관체 형식은 경계를 지닌 고통에 하나의 배경을 제공한다. 간접적이며 비언어적인 수단을 통해 고통의 유한함을 전달한다.

목회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이를 행한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비극이나 슬픔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의 경험에 경계를 설정하기 시작한다.

고통의 경험을 거듭 돌아보는 시간의 꾸준한 반복으로 온전함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런 시간에는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그 말을 하는 구조("매체가 곧 메시지다")도 중요하다.

답관체 형식은 고통에 끝이 있다는 생각을 전달함으로써 목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목회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므로 시간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을 끝내고, 한계 안에 두고, 정해진 틀 안에서 이야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애가가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통의 내용 하나하나에 주목한다. 고통의 내용을 끈질기고 자세히 추적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제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악은 끝없이 계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하지 않다. 그것은 평생 우리가 주의를 집중할 만한 가치가 없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만약 너무 일찍 끝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테고, 따라서 그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무 오래 지속될 때, 목회자는 신경증적 반응에 대한 부속물, 온전함을 방해하는 삶의 불완전한 조정 장치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건강하지 않은 몸을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악을 진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목회자에게 이러한 통찰은 필수적이다.

창세기와 욥기, 시편, 이사야에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성경적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빌로니아의 괴물 라합(혹은 티아맛)은 온 하늘에서 몸부림을 치며 깊은 바다를 휘졌지만, 마침내는 결박당해 제자리에 놓인다(계 20:1-3)

악을 인정하고 악에 대담하게 맞선다. 그러나 악이 하나의 집착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악에 관해 염려하기를 그칠 때가 온다.

고통당하는 이에 대한 목회에서는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이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악을 진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어하고자 한다면, 목회자에게 이러한 통찰은 필수적이다.

창세기와 욥기, 시편, 이사야에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성경적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빌로니아의 괴물 라합(혹은 티아맛)은 온 하늘에서 몸부림을 치며 깊은 바다를 휘졌지만, 마침내는 결박당해 제자리에 놓인다(계 20:1-3)

악을 인정하고 악에 대담하게 맞선다. 그러나 악이 하나의 집착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악에 관해 염려하기를 그칠 때가 온다.

고통당하는 이에 대한 목회에서는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이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초현실주의적인 악몽이 아니다. 그것은 냉정한 산문으로 묘사할 수 있으며 평범한 사람이 논의할 수 있는 제재題材로부터 시작되었다.

고통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장소와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

애가에서 감정은 강렬하지만, 사실은 확고하다. 각각의 감정이 사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고통을 어느 한 순간에도 단순한 감정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절대로 불안에 독립적인 현존을 부여하지 않는다.

역사적 자료로부터 단절될 때, 고통은 마치 기체가 방을 가득 채우듯이 사방으로 퍼져버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함락 전에 수세기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수세기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배경에 있었으며, 전경前景에 해당하는 미래에는 메시아가 있을 것이다. 애가는 우주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다.

목회자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만날 때, 목회 사역의 첫 단계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과 더불어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다음 책무는 정서적인 잔해를 치워내고 역사적인 기초를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무언가에 의해 촉발된다. 고통의 행동 배후에는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고통은 삶을 내파하며, 유산탄처럼 아픔을 흩뿌린다. 그 순간에는 상실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점차 여전히 견고하고 안정된 많은, 아주 많은 것들, 사람들, 영역들을 인식하고 접촉할 수 있게 된다.

특정한 역사 속에서 터전을 유지하는 데 실패할 때, 고통은 헬륨이 가득한 풍선처럼 우리를 땅에서 끌어올려 감정이라는 기류와 호르몬 분비라는 기압에 따라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다니게 만든다.

역사라는 버팀목이 없을 때 슬픔은 불안이 되고 마침내는 정신병이나 정서적으로 쓰라린 마음으로 변하고 만다.

역사가 필요한 것은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다.

애가에서 역사의 기층을 드러내고 개별적인 고통의 경험 속에서 그 기층을 노출시키려고 하는 이유는,(고통당하는 이가 소망하고 목회자가 기도하는) 구원 자체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결코 역사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신비한 황홀경이나 영지주의적인 각성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선포는 역사적이다.

고통이 역사와 분리된다면 선포되는 메시지를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고통의 사례-죽음, 우울증, 이별, 거부-에 대해서는 실제적이며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역사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애가에서 애통함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 아니라 예루살렘 함락이다. 이처럼 애통한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인류의 타락이라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침공에 따른 포위와 기근, 강간, 살인이라는 구체적인 조건이다.

역사로부터 단절될 때 고통은 그 원인에 비해 더 크게 부풀려진다.

사건으로부터 분리될 때 고통은 지적인 장난(고통의 문제에 관한 철학들)으로 변해버리거나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는" 정신병에 이르게 한다.

역사에서 동떨어진 고통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만든다

주변 상황과 단절된 고통스러운 감정은(이런 경우에는 어떤 감정이든지)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하고, 정서적으로 혼란하거나 감각적으로 퇴폐적인 온갖 증상을 초래한다.

애가의 시가 계속해서 역사라는 제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목회 사역에 유익하다

역사에 흠뻑 잠겨 있는 애가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목회자는 가용한 모든 비역사적 심리 요법으로부터 목회 사역을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다.

목회자는 슬픔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공감과 대결, 긍휼과 증언을 결합함으로써 그 슬픔을 이미 일어난 일의 일상적 실체들과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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