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책무는 역할을 정해주거나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에게 적합한 일을 하고 그들과 함께 그 이야기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창조적인 차이를 위한 여지가 충분한 구원의 역사라는 광대한 장 속에서는 전형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경건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신성모독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공식화된 불평이 성경에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불평을 공식화하도록 도움으로써, 즉 불만의 내용을 목록화하고, 어디서 하나님이 그분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하셨는지를 명확히 하고, 그분에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한 사람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

목회자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고소인의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 입장일 때도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극적인 방식으로 그는 모든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의 일을 이루고 계심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룻이 갑자기 자유의지를 개입시켜 단호하게 주도권을 잡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룻은 희생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무언가가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력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며(그리고 룻기에서는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여섯 차례나 그는 "모압 여인"이라고 불린다) 정해진 언약의 경계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역할-며느리, 모압 여자, 이삭 줍는 사람의 역할-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그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도록 격려함으로써-그저 어머니와 아버지, 배우자와 교사, 심지어는 목회자가 충고한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목회자가 이야기 만들기에 협력하는 때가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재료의 배열이나 남들은 간과했지만 숨겨진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관해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때가 왔을 때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에 관해서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보아스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부와 지위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그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모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관계를 모형으로 삼는 의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부, 자신의 영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결코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재력가’들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협력자가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명성과 재산, 권력이 당연히 집중되는 중심으로 여기는 대신 스스로 다른 이들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위치에 있다.

사실 누구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룻의 이야기만큼 위대해져가는 이야기들을 진술하기 시작하도록 도와야 할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신학적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룻기를 계속해서 읽을 때,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목회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관해 말하게 하고 자신이 그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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