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바르트는 이러한 목회 사역에서 아가서를 활용하고자 할 때 필요한 주석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는 창세기 2장을 주석하면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성적인 본성에 대해 검토하고, 인간이 언약적 관계에 참여하고 그 관계를 계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논증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실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그렇게 할 능력이 없음을 묘사할 때, 성적 은유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카를 바르트는 이러한 목회 사역에서 아가서를 활용하고자 할 때 필요한 주석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는 창세기 2장을 주석하면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성적인 본성에 대해 검토하고, 인간이 언약적 관계에 참여하고 그 관계를 계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논증한다
깨어진 약속이라는 폐허와 잃어버린 신실함이라는 파편 속에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다.
아가서는 성적 이미지를 예언자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예외에 속한다. 이 책에서는 창세기 2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 사랑 노래들은 온전한("구원받은") 관계로 귀결되는 인격적 만남을 이룰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아가서에서는 언약의 내적 기초를 묘사하기 위해 창세기 2장에서 사용된 성적 관계의 언어를 가져와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어떻게 분리된 것이 연합되는지, 어떻게 외로움을 벗어나 사귐에 이를 수 있는지, 어떻게 인격적 친밀함을 이룰 수 있는지, 어떻게 죄로 인해 파괴된 친밀함이 구원을 통해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이 언약을 위해서다. 그리고 아가서에서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언약의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 어떤 장애와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남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야만 하며 그럴 수 있고 그럴 것이다.
아가서가 특히 유월절 전통 안에서 사용될 때 구원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관계, 그 자체로 구원의 사건이 된 관계를 계발하는 목회 사역을 위한 자극과 지침이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하실 때 활용하시는 구조인 언약 안에서 그들의 창조와 구원의 관점에서 살아가고자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모든 창조와 구원은 관계적(언약적)이므로 그런 토대로부터,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발전하는 삶 역시 관계적(언약적)이어야 한다.
목회 사역 전체를 인격적 관계를 다루는 걸작인 아가서를 통해 이해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거친 후 창조의 결과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이 책을 경건한 삶-묵상과 기도의 삶-을 묘사하는 책으로 읽어왔음을 알 수 있다.
아가서가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한 맥락은 성경의 정경이다.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신앙 공동체가 이 책을 사용했던 전前역사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교회에서는 아가서에 등장하는 낭만적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날마다 삶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이해하고 이를 계발하고자 했다.
교회가 아가서를 우의적으로 영해靈解한 것이 고상한 체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현대 학자들은, 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었음을 알고 있던 고대인들의 지성, 그들의 시적 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문서의 주된 관심사는 현대인들이 그토록 몰두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이들 문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시적 상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맥락은 언약, 즉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이고 사랑받는 이는 인간, 즉 "남자와 여자" 모두다
성애를 다루는 내용은 신학적 맥락 안에서 읽어내야 한다.
고대인들은 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당혹스러워해서가 아니라 성을 성례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아가서를 경건의 관점에서 읽었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색깔을 취했다.
구원은 자아의 강화, 즉 고독한 영혼이 신비하고 심오한 깨달음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아의 추상화, 인격적인 것을 감정이나 사상의 단편으로 이상화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구원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하는 우리의 말에 의해 계발되는 인격적 관계다.
아가서는 모든 성경적 신앙이 작동하는 환경, 즉 대화적 언설의 세계, 질문과 대답, 초대와 헌신, 약속과 성취가 존재하는 세계, 말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표상한다.
목회자는 대화 상대자로서 성도들과의 대화를 통해 분열과 냉담,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극복하고자-그들을 이해하고, 타자의 진리를 발견하고, 타자의 의미를 자세히 살피고자-노력한다.
목회적 대화는 친밀함을 추구하는 인격체 사이의 대화다.
성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구조를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언약berit이다.
사실 언약은 인류가 명시되고 계시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아가서에 등장하지만, 아가서를 노래한 사람들은 언약의 관점에서 삶 전체를 이해했던 사람들이었다.
아가서에서는 나라 간 조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객관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격체들이 사랑을 나눌 때 사용하는 주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언약의 경험을 안으로부터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을 명시적으로 지칭하는 나라 간의 조약에서는 두 나라가 평화롭게 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한다.
잘 알려진 성적인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온전하고 건강하며 만족스러운 관계가 삶 속에서 실현되는 인격적 경험을 추구고자 할 때 그들 사이의 내적 역학을 묘사한다.
모세오경에서 언약을 세우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아가서에서는 언약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에 대해 노래한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리는 모세의 노래로부터 그 구원의 주관적 경험을 속속들이 살피는 솔로몬의 노래로 넘어가는 과정(이는 목회적 설교로부터 목회적 기도 및 대화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은 매우 갑작스럽다.
고독한 인격체의 외로운 고립 상태 안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함께 해야만 한다. 친밀함은 온전함의 필수요건이다.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에 반응한 이들은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아가는 중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의 행위다. 내가 말을 할 때, 설령 그것이 나 자신에 관한 말이라 하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중요성)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