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알려주면서 우리는 교수가 되고 그들은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부지런히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예배하고 사랑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미 내 안과 내 주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실재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 뿐이다.

왜 내게는 선생과 돕는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내가 되어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저 함께 동료가 되어줄 겸손하고 지혜로운 친구는 그토록 적은 것일까?

자리를 정돈하고 방해물을 치우고 참 현존을 확인하고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

나를 중요하게 여겨주고 내게 여지를 주어서 자유와 은혜를 느끼며 크고 자비로운 무엇을 찾게 해주는 것. 그것이 영적 지도이다.

목회에서 영적 지도는 이야기에 대한 인식을 키워준다. 이야기는 그 사람 속에 파묻혀 있는 많은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언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워야 하고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교제를 진전시키는 말의 사용법이 있다.

우리의 최우선 임무, 목사의 최우선 임무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교제이다.

말이 선물로 주어진 것은 교제를 위해서이다.

교제란 내 자아의 일부가 상대방 자아의 일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숨은 것을 드러내는 위험이 요구되고 개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제의 핵심에는 희생이 있다

중심에서 일하는 우리는 어떤 것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교제는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보다 신비를 더 깊어지게 하고 모호함을 수용하고, 알기 때문에 안전한 곳을 지나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찬은 ‘이것은 내 살, 이것은 내 피’라고 하는 가장 간단한 말을 사용해서 우리를 깊은 사랑 한가운데에 던져 넣고 구속되지 않은 것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모험을 나서게 한다. 이 말은 설명하지 않는다. 드러내고 가리키고 다가간다.

진정한 영적 지도는 예배 행위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듣는 자와 믿는 자로서, 노래하는 자와 기도하는 자로서, 받는 자와 따르는 자로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질서 있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행위인 예배는 일상생활에서도 지속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성은 방해받기가 쉽다.

마가는 ‘가르’를 마지막 단어로 택했다. ‘가르’는 우리가 걸어가는 도중에 놔버림으로써 균형을 잃게 만든다. 다른 한쪽 발이 어딘가에는 내려와야 한다.

실재를 완전히 재배치시키는 새 생명의 침입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생명으로 우리 앞에 맞닥뜨려 우리가 영위하는 최소한의 생명을 의문시하게 만드는 새 생명의 침입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두려움에 차 숨을 곳을 찾아 허둥거리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경외에 찬 두려움으로 모험을 무릅쓰고 예배로 들어가게 할 것인가?

마가의 ‘가르’는 기술적인 침묵이다.

마가는 독자나 청자가 개인적 결론을 자유롭게 ‘쓰도록’ 스스로를 억제한다.

마가 이야기가 극적인 탄력을 얻은 이 시점은 결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요나의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둘 다 독자와 청자 외에는 그 누구도 마지막 단어를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너무 깊고 개인적이다.

요나의 마지막 말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 자신의 마지막 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뀐다. 무엇인가를 추측하는 의미에서의 궁금증이 아니라, 우리의 결말은 어떨까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흠모하는 의미에서의 궁금증이다.

이제 요나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이 바뀌어 소명을 거룩함의 불길로 정화시키고 단련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거대한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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