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거룩한 땅인 회중 앞에 경의에 찬 외경심을 가지고 서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회중의 종교를 잘 분별하여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비판적 분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명석한 눈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회중은 다시 금송아지 숭배에 빠져버린다.
종말론은 우리가 굳은 흙을 부드럽게 하고 잡초를 뽑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목사에게 종말론은 농부의 쟁기와 써레, 괭이와 삽과 같다.(그러나 개발자의 불도저나 땅 고르는 기계는 아니다.)
우리는 이 표토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유지해야 한다. 비와 바람을 맞히고, 심고, 고르고, 가꾸고, 돌보고, 추수 때 일을 마친다. 완성telei?son이다.
목회는 종말론적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갔고 현장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것에 자신을 담갔다. 그러나 설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요나는 그 풍경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흥미롭게도 종말론적인 내용을 외쳤다.
진실하고 진정한 목회는 그 핵심까지 종말론적이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은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회 선언이다.
종말론은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는 영역이다. 미래는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졌느냐이다.
우리 언어에서 ‘끝end’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끝, 즉 종결이라는 뜻이 있고 목표, 즉 목적이라는 뜻이 있다. 이 두 의미는 깔끔하게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성경과 목회에 지배적인 것은 후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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