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이다. 우리는 보도에 발을 딛고 현장을 받아들인다. 목회는 신학적인 것 못지않게 지리적이다.
현장은 목회의 일부이다. 현장에 있는 것, 특정 교구의 특정 토양에서 일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조이스는 평범한 사람이 사는 평범한 하루라는 한계 안에서도 의미는 무한하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작가들은 이야기를 쓸 때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기보다 그 이야기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말을 종종 한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쓰거나, 적어도 아는지 몰랐던 것을 쓴다.
이미지와 플롯이 그들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는데, 다른 곳에서 와서 그곳에 도착한다. 이러한 신비로운 오고 감에 대해 열린 자세를 계발하고, 그러한 것들에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진짜 작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창조적인 일의 기초이다.
그것은 또한 영성의 기초, 즉 목사들이 증언하고, 인식시키고, 이미지와 단어를 제공하는 복음적인 삶의 기초이기도 하다.
목회는 니느웨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목회의 어려움은 복음은 보편적인 반면 우리의 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크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온 세상으로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큰 틀에서 일한다.
모든 교회는 지역적이다. 모든 목회는 지리적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장식된 섬세한 감정을 중심으로 복음을 구성한다. 영지주의는 또한 머리가 나쁜 사람과 뒤처지는 동료들을 답답하게 여겨 언제나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영적으로 깊은’ 그리고 서로가 잘 맞고 전문가 무리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서 호소력을 얻는다.
복음은 지역적 지식이며, 지역적으로 적용되고, 상당한 열성을 가지고 육신으로 물질로 장소로 뛰어든다.
그 현장에 있게 된 사람이 누구든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
목사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러한 조건들이 존중받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이 장소, 일상복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 "지역적 지식과 지역적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지역적인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이 존중받게 해야 한다.
베리의 지도하에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장소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 교구 일은 농장 일만큼이나 물리적이다. ‘이’ 상황과 ‘이’ 시간에 있는 ‘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이다.
이 장소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부과하는 것이 내 임무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대개 종교적인 일은 목회가 아니다. 그런 일은 영성을 방해하고 복음을 망쳐놓는다
우리의 일은 종교 기관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양육하여 성숙시키는 것이다.
거룩함은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 거룩함은 안에서부터 자라야 한다.
농부의 임무는 강제로 그 장소에 침입해서 자신의 리듬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아의 크기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비율을 이해하고 건강하게 잘 키우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공들여 작업하신 영혼이고,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 지으신 장소이다.
목회에서 회중은 표토이다. 모든 성령의 일은 예배하러 모이고 축복받고 흩어지는 이 사람들, 이 물질적 실체 안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아서 당연시하기 쉽고, 거기에서 상호작용하는 에너지를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쉽다.
내 신학의 도로를 깔고 선교의 건물을 짓고 커리큘럼 주차장을 만드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이 소중한 표토인 회중을 죽어 있는 비활성 물질로 대하고, 내 비전에 맞게 재조정할 대상으로 보고, 즉각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것들은 내 프로젝트를 방해하지 않게 전부 불도저로 밀어서 치워버리려 한다.
에너지와 영양분이 바글거리고, 죽음과 생명이 뒤섞인 그곳이 바로 목회 현장이다.
내가 그것을 제조할 수는 없지만 보호할 수는 있다. 영양분을 공급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도 농부가 표토를 대하듯 나는 회중을 존경하고 존중해야 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그 평범함 속에 담긴 거대한 신비 앞에서 외경심을 느껴야 한다.
목사들은 회중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임무를, 성급하게 종교 쇼핑몰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심으신 교구를 부드럽게 일구는 임무를 교회로부터 배정받았다.
공동체라는 확고한 맥락이 없다면, 공동체에 대한 목사의 애정과 충성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는 못마땅해서 외치는 고함으로 전락할 것이고, 우리의 연설은 우리의 영적 영광인 소중한 ‘나/너 대화’로부터 멀어져 이해를 분노 가득한 언쟁으로 바꾸는 ‘나/그것 고함지르기’로 격하될 것이다.
회중은 적이 아니다. 목회는 회중과 대립하지 않는다.
장의자에 앉은 이 사람들은 정복해야 하는 이방인이 아니다.
패배시킨 후 목사의 자아가 만족할 수 있게 재활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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