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기도는 단 한 단어도 독창적인 것이 없다. 요나는 모든 단어를 통째로 시편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단어만 기존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이 아니다. 형식 또한 시편에서 파생된 것이다.

지난 백 년 동안 양식비평 학자들은 시편이 취하는 특별한 형식에 주목했는데, 그 형식을 크게 두 범주로 정리했다. 하나는 애가이고 하나는 감사이다.

애가와 감사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처하게 되는 두 가지 조건, 즉 곤경과 안녕이라는 조건과 맞물린다.

영혼의 상태나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거나 찬양을 터트린다.

기도에서 정직은 필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삶을, 가능하다면 모든 삶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자 한다. 이 말은 삶의 복잡함에 걸맞은 기도 형식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시편에서 가장 흔한 기도 형식은 애가이다. 슬픔이 우리에게 가장 흔한 상태이니만큼 예상대로라고 하겠다. 우리는 곤경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에 애가 형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상황은 ‘애가’를 가리켰다. 그러나 기도는 비록 상황에 영향을 받기는 해도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요나는 기도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찬양’ 형식으로 기도를 드리기로 택했다.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두고 기도하고 싶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 전부로 반응하며 기도하고 싶다면,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도에는 오랜 도제기간이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상급학교로 가야 한다. 시편은 학교이다.

요나의 기도는 자신의 즉각적 경험보다 훨씬 더 큰 세계로 요나를 데려갔다. 요나는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크심에 적합한 기도를 드릴 줄 알았다.

우리 문화가 제시하는 기도의 형식은 대부분 자기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기회가 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내어 하나님에 대한 흠모와 하나님을 향한 순례로 우리를 이끈다.

통증에 얼얼해하는 사람들, 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혼란의 늪에 빠진 사람들 등 소명 때문에 참으로 다양한 상황 속의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 목사들은 특별히 그러한 구출이 필요하다.

진짜 작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개인의 경험이 재료를 제공하고 추동력이 되는 때가 많지만(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 쓰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더 큰 세계를 탐험하는 행위이고, 더 깊은 실재로 들어가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행위이고, 자신 너머에 있는 다른 인생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말 그대로 글 쓰는 행위는 창의적이다. 전에는 없었던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시편은 영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자기몰두로부터 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길로 나가도록 이끄시는 공동묘지이다.

시편은 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이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 호명하시는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다. 거기에서 우리는 응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냥 예, 아니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 전체가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호명하신 세계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뒤처져 있다.

우리는 욕망과 요구를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이 있는 야곱의 깊은 우물로 내려서 그것을 다시 물 위로 떠올리는 데에 적합한 그릇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아스케시스 형식은 매달 매일 순서를 따라서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묵상 기도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일상의 모든 구체적인 내용들로 확장하고 퍼뜨린다.

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14개 훈련은 영적 독서, 영적 지도, 묵상, 고백, 신체 운동, 금식, 안식일 지키기, 꿈 해석, 피정, 순례, 구제(십일조), 일기 쓰기, 안식년, 소그룹이다.

성경적·교회적 아스케시스인 시편 기도와 그 전후에 드리는 공동예배와 묵상 기도를 회복했다면, 우리는 전문성을 계발해서 그 어떤 훈련이든 필요할 때면 불러서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옆으로 제쳐둘 수 있어야 한다.

남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안팎의 상황, 그것이 지나온 역사와 현재에 신중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상황을 무시하고 모방하는 영성만큼 빠르게 망하는 것도 없다.

영성은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 반드시 직접 키워야 한다

기도는 흙에서 싹트는 씨앗이고, 그 흙에 있는 모든 것에 민감하다.

도구(훈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실제 흙의 상태나 채소와 과일, 영혼과 몸이 실제로 자라는 방식에 대한 경외감에 통합시키지 않으면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우리의 핵심 활동이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기도의 삶, 기도의 실천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자연적인 것에 책임 있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닿고자 했다.

소명의 거룩함이 경건한 소원 이상의 것이 되려면 목사들이 기도의 깊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신의 임재 안에서 그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영혼의 유혹은 미덕에의 초대인 양 가장한 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소명이 악화시키는 이러한 교만은 보통 개인 신앙과 공적 사역이라는 미세한 틈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처럼 행세하지 않으려면 묵상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명에 적합한 묵상의 삶을 개발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선의는 은근히 교만을 부채질하여(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묵상은 예배와 기도라는 거대한 실재를 구성한다.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성과를 중시하고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목사가 된다.

묵상하는 삶은 활동적인 삶의 대안이 아니라 뿌리이자 기초이다.

진정한 묵상가들은 영성에 도피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오류임을 보여준다.

목사들이 묵상하는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이 묵상하는 삶의 진실을 알고 그 에너지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묵상하는 삶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이 세상에 발생시키고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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