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성공주의가 익사하고 난 다음에는 목회 소명이 부활한다
우리는 원래 부름받았던 그 존재가 된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부름받은 그 존재가 된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가 찾아 나섰던 모든 것의 정반대였다. 물고기 뱃속은 어둡고 눅눅한 감방이었다. 아마 악취도 났을 것이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가 ‘아스케시스(askesis, 고행)’로 입문하는 길이었다.
창조적인 예술가와 기도하는 목사는 이 부분에서 일하는 기반이 같다. 제한이 없이는, 압박에 의한 강화가 없이는 말할 가치가 있는 에너지도 없다
이것은 예술가나 목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적·영적 생활에 통합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필수사항이다
어떤 아스케시스를 취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스케시스가 없이는, 제한·집중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영혼의 에너지도 없다.
훈련된 습관이라는 아스케시스의 의미는 창조성을 다루고 탁월함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 적용된다.
영성은 맥락을 요구한다. 언제나 그렇다. 영역, 경계, 한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외부에서 기계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배양되어야 한다. 아스케시스는 맥락에 민감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적 지도는 기관이 하는 일이 아니다. 기관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 기관이 없다면 나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전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관으로부터 영적 보살핌을 받으려 하고 소명에 대한 조언을 기대한 것은 잘못이었다.
사실 우리 회중은 우상을 쇼핑하고 있다. 그들은 쇼핑몰에 갈 때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주거나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줄 무언가를 얻기 위해 교회에 온다.
장 칼뱅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을 만들어내는 무한히 효율적인 공장으로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하기는 하지만, ‘질투하는 하나님’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그들은 스스로가 신으로 머물면서 통제하고 어려운 대목에서 도움을 받을 보조 우상 정도만을 바란다.
회중의 영적 위치는 에덴의 동쪽이다. 그곳에서는 자아가 최고 주권자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일 수 있는 길은 수도 없이 많고, 사람들은 그런 방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채워지지 않은 깊은 굶주림을 느끼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이 되는 것이고,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신이든 취해서 그 일을 돕게 하는 것이다.
목회 소명 실현에 주어진 세 번째 조건은 자아이다. 기관이나 회중과 마찬가지로 자아 역시 피할 수도 없고 호의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소명 때문에 하나님의 대의나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기 때문에 신의 정체성을 취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자아라는 조건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간파하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자아의 환상이 잘 발달하는 지점들을 자주 점검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뱀의 교활함처럼 그 환상은 아주 교묘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이름만 말하면 된다. 아버지, 아들, 성령.
목사는 그 인식을 슬쩍 찔러주어 그것이 주관성과 이데올로기를 지나서 공개적인 장으로 나와 ‘하나님’ 하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도록 되어 있는 일만 해야 한다. 그 이름을 말하고, 그 굶주림을 명명하면 된다
우리는 기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임무는 ‘한 가지 필요한 것’, 즉 보이지 않는 조용한 중심인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를 제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주장하게 된다.
빛나는 가운을 걸치고 ‘목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에 바쁜 우리는 또 하나의 금송아지를 만들 뿐이다. 이미 이 세상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금송아지를 말이다.
목사들이 일하는 기관, 회중, 자아라고 하는 조건은 피할 수 없고 강력하다. 셋이 하나의 굵은 밧줄이 되어 우리를 얽어매고 소명의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유망한 종교 직업을 거부하고 우상 생산에 징발당하는 것을 피하고 아론의 허영심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
이 방어 겸 공격이 바로 아스케시스이다. 아스케시스는 가장 가까운 자아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아를 아스케시스의 경기장으로, 기도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요나 이야기에서 아스케시스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물고기 뱃속은 갇힌 장소이며 피할 수 없는 극심한 한계의 장소이다.
아스케시스가 필요한 이유는 ‘신처럼 되라’는 사탄의 유혹을 우리가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조건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조건이라는 현실에 맞춰 살면 삶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무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인생을 깊어지게 하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또 한 가지 비자발적 아스케시스는 투옥이다
공식이나 기술적인 것들은 영적인 생활에 소비자적으로 접근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성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입맛과 식성에 맞게 이것저것 골라 먹는 식당이 되어버린다.
우선은 ‘아스케시스’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영적인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전무 혹은 거의 전무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내맡기는 환경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성토요일. 갇힘이 집중으로 바뀌고 환상이 소망으로 바뀌고 죽음이 부활로 바뀌는 날이다.
우선은 ‘아스케시스’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영적인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전무 혹은 거의 전무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내맡기는 환경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바로 거룩한 안식이 빠져서 다른 모든 진리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침묵하기를 거 부하고 비우는 것을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 조금이라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상을 풍기는 경험이나 사람은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아스케시스를 짓는 데 필요한 부품은 간단하다. 시간과 장소이다. 골방과 시계이다. 지성소와 침묵이다
문제는 날마다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 흔히 하는 미국식 조언, 즉 의지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효과가 없다. 목사들 대부분도 선의를 지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결심들이 두엄 더미를 이루고 있는 기도의 골방이 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성이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아주 다양한 상황과 기분과 성장의 단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어떤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스케시스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은 수도원이다. 수도원의 탁월함은 포괄성에 있다. 하루의 모든 시간이 기도로 정의되고 수사들의 모든 활동이 기도로 이해된다. 시간마다 날마다 해마다 이와 같은 외적 포괄성이 공동체와 영혼을 관통한다. 기도의 삶이 내면화되는 동시에 사회화된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예배와 일의 모든 것을 기도로 담을 수 있는 충분히 큰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인생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실제 조건에 부합하는 구조(아스케시스)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목회의 삶을 기도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아스케시스는 경건주의적 나르시시즘의 장이 될 뿐이다.
우리가 기도의 삶을 목회 소명의 포괄적 내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짓는 어떠한 아스케시스도 종교 공연을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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