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날마다 해야 하는 소박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목회에는 영예로운 면이 많지만, 회중은 결코 영예롭지 않다.
적어도 도표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예배와 기도의 장소에서, 날마다 일하고 노는 장소에서, 미덕과 죄가 오가는 혼잡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음을 누군가는 신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어느 곳이든 오래 머물다 보면 도무지 막을 수 없는 험담, 고장 난 난방 시설, 초점을 잃은 설교, 포기하는 제자들, 불협화음을 내는 성가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일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회중은 전부 죄인들의 모임이다. 게다가 그 회중의 목사까지 죄인이다.
회중 가운데 찬란한 순간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그런 순간들이 있다. 종종 있다. 그러나 지저분한 때도 있다. 그것을 왜 부인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정직한 목사는 회중의 형편없는 면을 깊이 인식한다.
목사의 소명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지, 명성과 재물을 찾아 저 멀리 종교의 바다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치를 경멸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의 스캔들을 수용하는 것, 그 굴욕과 그 안에 담긴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목회이다.
목사들이 교구 밖에서 자기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얘기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화 주제는 성공을 거둔 프로그램과 번지르르한 회심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목회의 규범은 정주이다.(한때 그랬던 것처럼) 20년, 30년, 40년 목회는 예외가 아닌 전형이 되어야 한다.
요나는 불순종할 때보다 순종할 때 상태가 더 심각하다. 순종하는 요나는 화가 나 있고 앙심을 품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를 싫어한다. 니느웨를 경멸한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가장 경멸스러운 곳이고 요나는 니느웨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분노로 하나님의 영을 배신하고 만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자 요나는 불평을 터트린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과 이제 막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요나는 이제 자신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 요나는 회중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하는 설교의 문자적이고 지배적인 권위에만 신경 쓴다.
목회와 연관해서 변주되기는 했으나 영성의 가장 오랜 진실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덕스런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가장 심각한 죄를 저지를 위험에 처한다
우리가 착하게 굴 때 또한 가장 나쁘게 굴 수 있다
책임 있게 행동하고 순종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쉽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대체한다.
우리가 순종하며 성공적으로 목회를 잘할 때가 오히려 불순종하며 도망갈 때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에게 제대로 경고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는 불순종하는 요나보다 순종하는 요나를 훨씬 더 매력이 없는 인물로 그린다.
불순종할 때는 적어도 배에 탄 선원들에 대한 연민이라도 있었는데, 순종할 때는 니느웨 사람들을 경멸하기만 한다.
여기에서 신비롭고도 자비로우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요나의 두 가지 반응을 모두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요나가 도망치며 불순종할 때 배에 탄 선원들은 주님께 기도했고 믿음 생활에 들어섰다.
요나가 화를 내며 순종할 때는 니느웨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경솔하게 불순종하고 무정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고, 자비롭게도 자신의 일을 위해 우리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사용하신다는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이 아니었다면, 우리 앞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 같은 이 이중의 실패가 매우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공적도 취할 수 없도록, 그러나 또한 바다에서든 도시에서든 우리가 요나만큼의 역할을 한 그 일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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