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이야기는 목사의 소명 체험을 날카롭게 환기시킨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꾼들은 이야기를 서로 교환한다.

의지력은 내적 에너지를 얻는 데에는 턱없이 부실한 엔진이다. 그러나 알맞은 이미지는 조용하나 가차 없이 우리를 실재의 장으로, 에너지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비유와 기도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배경에 길들어서 영적 지각이 무뎌진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진리를 인식시키는 성경적인 도구이다.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가정과 일터에서만 재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예배당과 사무실, 연구실과 회의실에서도 매일 재연된다.

종교적 일터에서 일어나는 뱀의 유혹과 에덴에서 있었던 뱀의 유혹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목사는 언어를 잘 사용하기 때문에 유혹을 받을 때마다 자기를 기만하는 완곡어법을 쉽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종교적 개념을 다루는 유창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재간 있게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이 동산을 돌보는 것에서 동산을 운영하는 쪽으로 바뀌어도 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비유와 기도는 그러한 허울을 비껴 지나가면서 진실을 드러낸다

비유와 기도는 전복적이다.

희극적 요소와 과장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승인한 경력이라는 우상숭배 안으로 은근슬쩍 들어온다. 재미있어 하며 웃는 동안 경계는 늦춰지고 우리의 상상력은 소명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로 들어선다.

심연 앞에서 머뭇거리던 우리는 비유와 기도에 사로잡혀, 우리의 부름에 적합한 영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깊은 곳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안내받는다.

심연 앞에서 머뭇거리던 우리는 비유와 기도에 사로잡혀, 우리의 부름에 적합한 영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깊은 곳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안내받는다.

요나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 인기를 누리는 이유 중 하나는 장난기 때문이다. 요나서는 내용도 문체도 모두 장난스럽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장난기를 흔들어 깨운다.

장난스럽다고 해서 마냥 까부는 것은 아니다. 장난스럽지만 경솔하지 않고 아주 진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인생과 진실의 어떠한 면들은 상상력 놀이, 혹은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난다. 텍스트를 장난스럽게 대하는 것도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아온 해석 방법 중 하나이다.

랍비들은 미드라시 밑에 숨어 장난스럽게 텍스트를 해석하곤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텍스트를 아주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대하려 한다.

요나 이야기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어서, 독자들의 소명과 더불어 요나의 소명을 영성 안에 둔다.

이 두 개의 흐름이 서로 결합해서 허세를 강타한다.

목회 소명은 허세에 찬 낭만주의로 가득하다.

허세에 찬 낭만주의가 배 밑에 들러붙은 따개비처럼 더덕더덕 붙어 있다. 요나 이야기는 배를 수리하려고 파놓은 건뱃도랑에 우리를 끌어다놓고 묵직한 거짓 위엄을 긁어내고 환상으로 부풀려진 야망을 떼어낸다.

도입부에서는 불순종하는 요나가 나온다. 그다음에는 순종하는 요나가 나온다. 두 번 다 요나는 실패한다. 성공하는 요나는 보이지 않는다. 요나는 나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모델이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니다. 요나 이야기는 겸손을 훈련시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겸손은 비굴한 겸손이 아니라 아주 쾌활한 겸손이다.

목회 소명에는 아이러니가 많은데,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이러니가 바로 이것이다. 요나는 주님의 명령을 이용해서 주님의 현존을 피한다.

얼굴은 우리의 근원이고 태양이며 그 아래에서 우리는 친밀하게 잉태되고 따스하게 빛을 받은 존재로 자기를 실현한다. 얼굴에 대한 이런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은유로 발전했다.

요람에서 시작된 느낌과 반응은 어른이 되면서 믿음의 영향 아래 예배 행위로 발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흠모하고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길로 들어서는 계획적인 모험이다.

이 모험을 통해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기만 들여다보는 자기애적 소외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의 말로만 현실을 정의하는 데서 벗어난다.

하나님을 맛보면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이 일은 에덴에서 처음 일어났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황홀경과 완전함은 다시 하나님으로서 그 경험을 맛보고 싶은 유혹을 동반한다. 하나님을 맛보더니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탐심으로 왜곡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세상을 얼핏 보고는 나도 저 자리에 한번 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을 저버리고 비인격적이고 약아빠진 뱀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사람들을 조작하고 신처럼 행세하게 해주는 미끈거리는 종교의 세계로 나아간다.

나 자신을 위해 권력과 영광을 얻을 기회를 모색하는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싶어지고,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지며, 자만심을 키우고 권력을 얻을 장소를 찾고 싶어진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런 유혹을 받지만, 목사들은 소명 때문에 유혹을 훨씬 많이 받는다.

처음 소명의 길에 들어설 때는 주님의 현존을 기뻐한다.

이 유혹은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기 시작한 지 한참 지나 찾아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주하신 사역의 기본에 대한 유혹이 찾아오는(마 4:1-11) 초기 시절만큼 경계하고 있지 않을 때에 찾아온다.

게다가 목사들은 신처럼 행세할 수 있는 상당히 두터운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도덕성과 관련된 유혹들, 그래서 사회적·물리적 대가가 확실한 유혹들과 달리 이 유혹은 거의 완벽하게 영적이며 흔히 사회적으로 강화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오래 자주 이야기하다 보면 비약적인 상상력이 없어도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처럼 행세할 수 있다.

존경하며 따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행세가 강화되고, 권력과 칭송이 쌓이기 시작하면 주님의 현존을 계속해서 피해 다니게 된다. 주님 의 얼굴을 대하면 자신의 거짓 행세가 드러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오래전부터 평신도로서건 목회자로서건 지도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해왔다

리더십을 취할 생각만 해도, 소박하게 살짝 관여만 해도, 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죄의 가능성들이 즉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새로운 죄의 가능성들은 죄라는 걸 알아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전부 미덕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방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미끼를 무는지도 모르고 주를 섬기기 위해 이 새로운 ‘기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기회가 약속하는 것 같았던 결과는 이내(혹은 너무 늦게) 저주였음이 드러난다. 그런 위험을 직접 경험한 야고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 마주치는 죄는 쉽게 저항하지는 못해도 쉽게 눈치챌 수는 있다.

소위 ‘저급한 죄들’, 한때 육신의 죄로 분류되었던 죄들은 자명하고, 신앙 공동체뿐 아니라 일반 사회도 그런 죄가 성행하는 것에 반대한다.

고도의 죄, ‘영혼의 죄’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진단하기가 어렵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절대로 쉽지 않다. 종교만큼 속임수가 횡행하는 곳도 없다. 그런데 가장 쉽게 그리고 저주스럽게 속는 사람이 지도자 자신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다.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다. 마귀가 유혹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자명한 악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선한 것이다

우리보다 지혜로웠던 세대들은 지도자들에게 충고와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어떤 유해한 일을 만나게 될지 충분히 알리지 않고는 이 위험한 길에 들어서게 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자주 점검했다. 그렇게 해도 조난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은 사람들을 이 위험한 길로 보내는 단순함에서, 혹은 그들의 진실함을 믿는 순진함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지도자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가 가장 믿을 만하지 않다. 그 자리만큼 교만과 탐심과 탐욕의 기회가 많은 자리가 없고, 그러한 비열함이 밝혀지거나 추궁받지 않도록 잘 가릴 수 있는 방법이 많은 자리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소명과 임무를 받는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만, 목적지는 직접 선택하겠다고 점잖게 요구한다. 목사가 되기는 하겠지만, 니느웨에서는 절대 안 할 것이다. 다시스로 가보자. 다시스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고도 종교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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