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존재는 목사로서 내가 할 일 안에서 확인되고 그 일로 확장되었다. 나와 내 일이 서로 만났다.
내 일이 내 신앙의 확장이 되고, 믿음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닦는 일이 나의 소명이 되었다.
그런데 커다란 틈이 내 앞에 벌어졌다. 이 틈은 개인적 신앙과 목회 소명 사이의 간극이었다.
나는 그 틈이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고 예상보다 더 많은 집중을 요구했다
나는 개인적 신앙과 교회에서의 소명 사이에 생긴 불연속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존재가 목사의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목사로서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과 불화할 때가 많았다.
그 바닥에서 나는 개인과 소명이 서로 한 쌍이 되는 것 같은 정합성을 느끼며, 내려간 만큼 올라올 수 있었다.(그러나 반드시 내려간 후에야 올라올 수 있었다.)
목사라는 소명은 그렇게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알리고 실천하는 혁명적 복음 사역에 꼭 필요한 자리이다.
소명을 위한 영성, 즉 외면에 적합한 내면을 갖추는 조건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목회 소명이라고 해서 다른 소명보다 특별히 실현하기 힘든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제자도에 적합한 영성을 갖추게 하는 한편 우리 자신의 곤경도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구해놓고 정작 우리는 버림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목사가 목사로 사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뭘까? 우상숭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소명 차원의 우상숭배이다. 목사들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관리할 수 있는 경력을 만드는 우상숭배를 한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경건해도 소명에서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니와 실제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건한 목사가 참된 목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대다수의 목사들은 정말로 사람이 좋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경건하다. 그러나 그러한 선함이 반드시 소명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름이 악마가 제안한 일, 즉 사람의 편의에 따라서 측정되고 조작되는 일로 대체되었다는 뜻이다.
목사들은 입으로는 거룩한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경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은 신학의 진리나 영성의 지혜가 아니라 시장의 압력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우리가 삶의 경건함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소명의 거룩함에도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나는 성경적으로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 창조와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잘 계발된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 여유롭고 성령 안에 푹 잠긴 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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