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도록 사람들을 강요한다면, 우리의 의제에 그들이 반응하도록 조작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주께서 그들 인생의 뒷마당에서 자라게 하시는 자그마한 은혜의 푸른 싹들을 인식하기도 힘들다.
잡담을 피하는 것은 우리가 일하라고 배정받은 현장 자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위기 상황이 아니며, 늘 중대한 문제에만 매달려 살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과에 매여 있으며, 잡담이 그들의 자연스런 언어이다
목사가 그것을 사소하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에 하는 일을 사소하게 보는 것이며, 복음을 잘못 대변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소박한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존재의 풍성한 현실 대부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도도한 교만을 경고했다.
목사들은 큰 진리와 자주 관계하기 때문에, 거대한 신비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특히나 대화의 겸손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겸손은 땅(‘후무스humus’)에, 사람에, 일상생활에, 실제적인 일들에 가까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중대한 문제만큼이나 평범한 것들을 존중하면서 대화에 집중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통찰들은 웃을 때에만 접할 수 있다. 또 어떤 것들은 간접적으로밖에 얻지 못한다.
여기에는 기술이 필요한데, 잘난 체하지 않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창의적으로 그 만남과 기회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우리가 맡은 직위의 존엄성이 거기에 달려 있는 양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한 기술은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회의와 대화에 ‘선행’하신다고 확신할 때에 더 잘 개발된다.
우리는 매주 시내 산 강단에 올라 "기교 있는 천둥"(에머슨의 표현이다)의 권위로 사람들을 설득하리라는 희망으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평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내려올 때에는 다른 기교가 필요하다. 바로 잡담의 기술이다.
신학적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것은 그를 위선적이거나 역겹거나 악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태도나 도덕성에 대한 일격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용서와 은혜가 가장 중요하다는 신학적 믿음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분개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그가 그들을 "자기 안에는 가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으로 보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과 힘과 연민과 기쁨이라는 신의 속성을 은밀히 부과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자기와 같은 죄인으로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슬픔과 결점, 고통과 실패를 그들과 나누려 할 것이고,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표시를 지켜볼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열렬히 찬양할 것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이해하면 분노 없이 목회할 수 있다.
(목사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분노 축적은 비실제적인, 즉 비신학적인 전제를 버려야 해결된다.
사람들이 죄인이라면, 목사들은 앉아서 사람들이 나쁘다며 슬퍼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왔다. 목회의 대화와 설교의 주요 주제는 은혜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들은 자신의 심리적 생활이 양육되기를 바란다. 은혜는 지나쳐버리고,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은 목사에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내적 자원과 가능성을 믿으라고 고상하고 진지하게 말한다.
목사는 거기에 굴복하면 안 된다. 그 길을 막아야 한다. 사람을 죄인으로 이해하지 않는 순간, 목회 사역이 헌신한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진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신학적 이해의 행복한 결과는 그들이 사실상 죄인이라는 사실에 목사가 계속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죄인은 정죄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기대이다.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것,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 표적을 벗어난 사람, 길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큰 기쁨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는 목회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 하신 위대한 행위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면, 그 다음에는 죄가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재빨리 얻어야 한다.
죄는 특정한 인간적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특정한 목사의 반응을 요구한다. 죄를 너무 추상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목사는 죄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목사는 구체적 자리와 구체적 사람의 세계로 들어간다.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개인의 인생이라는 시간의 경계와 그 사람의 주소라는 지리적 위치 내에서 가능하다는 기본 사실을 일상의 언어와 이미지로 확립하고자 한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신학적 이해를 갖추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죄가 개인의 역사에서 취하는 특정 형태를 목사가 찾기 전에는 사역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죄의 형태를 구분하고 구별하며,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기도하고, 증언하고, 대화하고, 각 교인의 얼굴에 적합하게 은혜를 설교할 때 목회 효과도 커진다.
목사는 모든 연령대의 교인에게서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좀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과거 교회에서는 적절한 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목사를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전문가의 역할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못한 것으로 돌아서서 종교적 체험을 만들어내고 그분은 회피한다. 그들은 진짜를 직면하기에는 자신들이 ‘부적절하다’고 변명한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미덕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며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우상숭배의 냄새가 나는 일이다.
목사가 부절적함을 불쾌한 감정으로 본다면 그는 심리적, 도덕적 수단을 사용해서 그것을 없애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죄의 징후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엄청난 임무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 계신지를 지적하며 친절하고 부드럽게 그 하나님을 제시할 것이다.
어떤 사람 안에 작용하는 은혜를 알아보는 목회적 분별력은 그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계속 접촉하게 해준다.
어떤 사람 안에 작용하는 은혜를 알아보는 목회적 분별력은 그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계속 접촉하게 해준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이웃 간의 상호의존을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아를 신처럼 취급해달라고 맞서서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언약적 삶에 기초가 확립되었고, 고대 중동(과 현대 서구!)의 문화적ㆍ경제적 개념과는 달리 그 기초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있는 신적 가치를 보호해주었다.
백성은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생명과 미래를 보장해줌으로써 여러 세대에 걸친 죄책감의 사슬을 풀어주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충성하는 인격적 관계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를 가진 공동체 안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유배 때문에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몸부림으로, 유산으로 받은 과거의 영적 소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들에서 성령께서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해결책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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