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함께 사는 이 사람들은 블레셋과 바리새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교구는 사실 예배 센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를 갈망하는 것이지 교의학 시험을 위한 벼락공부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교회 생활의 준거가 되는 핵심 언어는 늘 기도의 언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사로서 나의 우선적 교육 임무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나는 오래전에 고인이 된 선조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아빌라의 테레사가 출발점이었다.
나는 이 대가들을 멘토로 삼았다. 그들은 기도의 개념을 확장해주고, 포괄적이고 상상력 넘치고 격렬한 기도의 언어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또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내가 하는 최고의 일임을 확신시켜주었다.
언어 1은 최초의 언어이고, 인간 조건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쓰는 기본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움직이고, 언어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언어 1, 즉 친밀함의 언어이자 신뢰와 희망과 이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언어는 시들해지고, 일단 유년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사용할 일이 갈수록 줄어든다.
나는 철저하게 세속화된 학교와 판매 중심 사회에서 배운 것을 교회에서 그대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의 인간성과 믿음에 기초가 되는 언어, 사랑과 기도의 언어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데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자신을 신뢰하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이 인격적인 말로 그 말씀에 응답하도록―1인칭으로 2인칭에게, 내가 너에게 말하고 3인칭 논평은 최대한 피하도록―지도하고 격려하는 것이 나의 본질적인 교육 임무였다.
기도는 언어 1이다. 하나님이나 믿음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하나님과 믿음을 섬기는 언어가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어이다.
목사의 최우선 설교 임무가 인생 전환이라면, 목사의 최우선 교육 임무는 언어 전환이다
존재의 모든 차원을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일로 끌어들이는 이 믿음의 삶에서는 모든 언어에 능숙해야 한다
내가 가장 잘 쓰는 언어와 다른 사람들이 능숙하게 쓰도록 가르쳐야 하는 최우선 책임이 있는 언어는 언어 1, 관계의 언어, 기도의 언어라고 결정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교차하는 지점의 핵심에 있는 문제가 바로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의 관계는 특수한 종교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간성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생물학 너머의 일들, 그러니까 먹고 입는 것 너머의 일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이 의지라고 하는 특이한 문제가 연루되었고, 그 방식은 전혀 자명하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주체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한다." 내가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존재, 즉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내 주께서 시작하신 행동에 들어가 그 행동의 결과에 참여한다.
내가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내게 그대로 행해지지도 않는다. 발휘된 의지에 내가 의지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기도와 영성의 특징은 참여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분의 뜻과 우리의 뜻이 복잡하게 참여한다.
은혜의 강에 자신을 방치하고 사랑의 바다에 빠져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정하지도 않고(능동태), 하나님의 의해 조정되지도 않는다(수동태). 우리는 행위에 연루되어 있고 그 결과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중간태). 기도는 중간태로 이루어진다.
복음은 중간태를 회복해준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유래하지 않은 행위에 기도와 의지로 관여하며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연루된 행위에 주체가 된다. 중간태에서는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온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주어가 된다.
이 제3의 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인간의 절묘하고 독특한 모험에 미세하게 맞춰진 이 용법에 대한 동사적 경험이 우리는 충분하지 않거나 전혀 없다.
능동태와 수동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우정이나 연애나 결혼은 없다.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수없이 미묘한 참여와 친밀감으로, 신뢰와 용서와 은혜로 발산되는 자발성이 필요하다.
인간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최고 모습은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에 서서 중간태로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경외함이 이 문장의 핵심이다
경외하고 집중하며 사랑과 흠모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복음 경외, 그리스도 경외, 배우자 경외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그러나 결코 주제넘지 않은) 대범한 자유이며, 자발적 에너지가 넘치는 자유이다. 바로 그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고 사랑한다.
우리는 압제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 앞에 언제든 엎드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 쏟아부으셨기 때문이다. 의지적 수동성이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내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자발적인 십자가의 죽음이다.
결혼생활은 의지적 수동성의 가능성을 폭넓게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복잡한 현실에서 날마다 관계를 맺는다.
일에서든, 언어에서든, 결혼에서든, 기도에서든, 모든 친밀감의 행위는 고의성은 억제하고 자발성은 계발한다.
창조 행위에서 우리는 모두 고의성을 억제하고 자발성은 계발한다.
거기에는 자아보다 더 큰 무엇, 자신보다 더 나은 어떤 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깊은 의식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더 큰’과 ‘더 나은’을 지칭하는 인격적인 이름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자유로운 의지의 자질 중 하나는 그것이 작용하는 필연성의 성질과 범위를 아는 것이다.
필연성에 신경 쓰지 않으면 의지는 교만해지고 자만심에 빠지거나(그렇게 되면 반드시 비극으로 벌을 받는다고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식물 상태와 구별되지 않는 무기력함으로 움츠러든다.
건강하고 원기 왕성한 의지―자유로운 자발성―안으로 들어선 겸손한 담대함(혹은 담대한 겸손)은 우리의 구원을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가장 만족스럽게 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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