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의 표면적 언어 너머를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앞에 쳐놓는 기독교 언어의 이면을 보는 것이지요. 외부인들에게 미국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영성이 아니라 물질주의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을 쫓아오지 않습니다. 부와 안락을 약속하는 것으로 그 복음을 해석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전복적인 사람이란, 적어도 겉으로는 문화적 색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전복적인 일은 조용히 숨어서, 인내하며 하는 것입니다.

전복적인 사람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비밀 메시지를 지니고 다니면서, 문화가 궁극적이라고 제시하는 것 너머에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심습니다.

평범한 기독교적 행위들입니다. 희생적 사랑, 정의, 소망의 행위들이지요.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개발하고, 이러한 일들을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핵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키웁니다.

전복적인 사람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터를 준비하고 믿음과 소망의 방향으로 조금만 분위기를 바꿔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게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복음의 이미지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성장의 이미지들입니다

미국에서 목사라는 소명이 실현되는 방법을 관찰하고, ‘목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어조와 맥락을 들어보면, 내가 그 단어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매우 다름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용례에서 보자면 그 단어는 힘이 없고, 패러디에 자주 등장하며, 기회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사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명사를 분명하게 해주는 형용사 세 가지를 제안한다.바쁘지 않은, 전복적인, 묵시적인.

바쁘다는 말은 헌신의 낌새가 아니라 배신의 낌새다. 헌신이 아니라 변절이다.

목사 앞에 붙는 ‘바쁘다’라는 형용사는 마치 ‘간음하는’ 아내나 ‘횡령하는’ 은행가라는 말처럼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스캔들이고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다.

투르의 힐라리우스Hilary of Tours는 목사가 바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고 하는 신성모독적 불안irreligiosa Sollicitudo pro Deo’이라고 진단했다.

허영심 때문에 바쁘다. 나는 중요한 사람, 비중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꽉 찬 일정과 일에 시달리는 것이 중요성의 증거가 되는 사회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래서 일정을 채우고 일에 시달리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본다면 나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고, 그러면 나의 허영심이 만족될 것이다.

게으르기 때문에 바쁘다. 나 스스로 단호하게 결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대신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나태함이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목사란 모호한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과 선한 뜻에 관련된 것들과 어렴풋이 연결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종교적이거나 뜻이 좋으면 바로 목사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C. S. 루이스는 게으른 사람만이 열심히 일한다는 주제를 즐겨 사용했다.

결정하고 지휘하고 가치를 확립하고 목표를 세우는 핵심적인 일들에 대한 책임을 게으름 때문에 다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서 해준다.

허영심 때문에 눈에 띄는 활동으로 내 하루를 채우거나 다른 사람들의 고압적인 요구들로 내 하루를 채운다면, 내가 정작 해야 할 일, 내가 부름 받은 일을 해야 할 시간이 없다.

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잔잔한 물가의 조용한 장소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면 어떻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발하고 싶다.

기도의 삶을 발전시키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안다. 따로 떼어놓은, 훈련된, 의도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보다 하나님께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요란한 내 자아보다 하나님께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 그렇게 하려면 일상의 소음에서 일부러 벗어나야 하고, 만족을 모르는 자아로부터 의식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설교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나는 성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언어와 리듬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성경에 흠뻑 젖어야 한다. 성경공부에 푹 잠겨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붙잡고 곰곰이 생각하고 성경의 의미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씨름해야 한다.

주일마다 우리 교회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의 권위를 느끼고, 그들이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의 현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되는, 그러한 설교를 하고 싶다. 괜찮은 개요와 산뜻한 예화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듣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주중에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러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그들의 말을 정말로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있어서 그들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짐작해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너무도 많은 심방이, 가서 출근 도장 찍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바쁘게, 밥값하며 제대로 일하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 되어버렸다.

목회에서 듣는 행위는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한 여유로운 분위기에서만 사람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존엄하게 그리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음을 안다.

누군가의 말을 들은 횟수가 누군가에게 말한 횟수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으려면 메시지를 전달할 때보다 언제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바쁘면 들을 수가 없다. 일정이 꽉 차 있으면 들을 여유가 없다. 다음 약속을 지켜야 하고, 다음 회의에 참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하루에 여백을 둔다면, 들을 시간은 충분하다.

물론 남들보다 먼저 그 달력을 챙기는 것이 요령이다. 나는 기도, 설교, 듣기 같은 창조적인 일들이 나올 수 있는 기도, 독서, 여가, 침묵과 고독을 위한 시간을 미리 표시해둔다.

예약 달력은 목사가 기도, 설교, 듣기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여유를 얻을 수 있는,(성 바울이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령께서 주신 선물이다.

약속을 적어두는 예약 달력이라는 도구가 있으면 바쁘지 않을 수 있다.

본질적인 것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면, 나는 바쁜 목사가 되어서 지치고 불안해하며 불평하게 된다.

아무도 내게 처방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직접 처방해야 한다.

아무도 내게 처방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직접 처방해야 한다.

목사들은 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또한 그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다. 양심의 부추김, 옛 분노에 대한 기억, 성경적 명령의 도전이 이 세상이라는 무법 상태의 바다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러한 세상에서 소음은 불가피하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배에 작살을 꽂을 사람이 없다면 그 추격은 제대로 끝을 맺을 수 없다. 혹은 작살을 꽂을 사람이 자신의 임무는 제쳐놓고 노를 젓느라 지쳐 있다면, 창을 던져야 할 때 제대로 정확하게 던지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노 젓기를 자청하는 것이 언제나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도덕적 대의를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며, 영원한 결과가 있음을 아는 싸움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일이 더 호소력이 있다.

누군가는 작살을 던져야 한다. 누군가는 작살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역하는 삶에 사용하신 은유는 단일함, 작음, 조용함의 이미지들인데, 그것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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