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가 노예에게 가해진 낙인, 즉 소유권을 명시하기 위해 만든 상처 자국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스티그마타’는 1:10에서 바울 자신이 명명한 자기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노예’와 서로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 예속됨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낮음이 있었고, 높은 신분을 지닌 주인에게 속한 노예는 여러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확하게 언급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영향력을 드러냈다.

사실 그의 모든 문장은 갈라디아인 신자들을 적대자의 영향권에서 빼어 내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다듬어진 것이었다.

은혜, 영, 하나님의 부르심, 이 세 가지가 갈라디아서의 키워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당부했듯이 갈라디아서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야 한다. 이 편지가 갈라디아인들 앞에서 처음 낭독되었을 그때 그 자리를 상상하며.

복음은 사람의 지성과 영성과 도덕성을 변화시킨다.

믿음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과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된다.

변화의 최종 목표는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참여한 사람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

흉내가 아니라 변화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존재가 그리스도-사람Christians이다.

있다. 성서해석의 옳고 그름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판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정체성, 그리스도를믿음, 그리스도인의실천, 이 셋은 하나이다.

복음은 지성의 갱신을 낳는다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재조립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뉴마’의 내주를 통해 어리석었던 정신(갈 3:1 참조)이 새롭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세세한 도덕 지침을 제공하지 않고 굵직한 방향 표시등만 제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사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체적 행동 지침 없이도 영의 인도에 따라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갱신된 정신을 가진 개인이 모인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에 바른 방향의 숙고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종교가 난립하는 종교 시장market에서 충분히 매력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제공한 담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자 개인의 오판은 ‘타락한’ 이성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갱신된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시민사회의 공공성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은 존재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갱신된 지성을 가진 사람에겐 모든 것을 분별할 눈과 귀가 있다.

복음의 핵심인 생명을 진작시키며 돈과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행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복음은 민족, 사회 계급, 신분, 빈부, 직업, 성별이 ‘이신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크게 외치고 있다.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우고 인정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와 분류 체계를 가뿐히 무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무시하시는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탐하는 것처럼 모순적인 일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인(갈 5:24)이 다시금 욕망에 휘둘리는 퇴행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은 그의 재산과 학력과 나이와 성별과 출신지가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옷으로 가려진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볼 때 그리스도라는 옷만을 보게 된다.

갈라디아서는 신자의 퇴행 가능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가 자칫 잘못하면 끊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갈라디아 회중의 특정 문제를 다루느라 위협적인 말을 곳곳에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겁을 주기 위한 시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정죄받고, 내주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라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이 깨질 수 있고, 은혜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쫓겨날 수 있으며,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수 있다

구원과 칭의는 대체로 미래의 지평에 있으며, 이는 신자의 변화와 순종의 행위를 전제한다. ‘한번 구원받으면(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그 구원은 영원히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는 바울이 실제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이 구원과 칭의를 말할 때는 늘 약간의 불확실성을 살짝 추가한다.

우리는 약간의 불확실성이 주는 긴장감이 그리스도인됨Christianness을 정의하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본다. 흠 잡힐 데 없고, 별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

스텐달의 해석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바울의 고민과 루터의 고민은 다르다! 루터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그의 양심의 갈등은 바울이 씨름했던 문제와 관련이 없다.

스텐달은 이신칭의 교리가 루터와 같이 양심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구원의 원리가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이 어떻게 유대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교회적, 사회적 차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었다고 역설했다.

‘바울에 관한새로운new 관점’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2020년 현재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지만 바울학계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신약학계의 관행에 따라, 하나의 고유명사로 써도 무방할 것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밖에서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던 과거를 버리고 오로지 그리스도께 자기를 의탁하는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강조한 반면, 케제만은 개인적 측면을 넘어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를 변화시키는우주적 차원의 하나님의 힘과 주재권을 강조했다.

두 사람은 바울 해석에 있어 이렇게 중요한 차이점을 보였지만, 고대 유다이즘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은 이해를 보였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간단히 말해 고대 유다이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한 응답이다.

단지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이 인류가 지닌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샌더스는 바울이 선택, 토라, 언약, 이 모두를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자가 샌더스를 ‘새 관점’ 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지만, 샌더스 자신은 바울 해석에 있어 언약 개념과 유대적 유산을 강조하는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와 선을 긋는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편지(갈라디아서)의 청중들이할례나 음식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준수를 떠올리기 원했다.

이러한 관찰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identitymarker, 유대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 유다이즘의 배타주의, 언약에 대한 협소한 이해 때문이다

던Dunn이 보기에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지점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갈라놓는 율법의 사회적 기능에 있다.

‘그리스도-사건theChrist-event’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동안 지녔던 가치 체계와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던에 따르면 종종 ‘언약에 대한 오해’를 모두 뛰어넘은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음faithinChrist’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칭의의 근거로 작용한다.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유대인처럼 사는 것’과 ‘이방 죄인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자 ‘유대인이 나머지 인류로부터 구분되어 하나님의 백성에 속했다는 상태를 보장받는 것’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해 그의 백성을 재정의하셨고, 따라서 ‘율법의 행위들’이 하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역할은 이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언약이 유대인과 유대 문헌의 기저에 있는 확신이어서 어떤 유대인이 어떤 주장을 하든 이미 언약 백성이라는 지위를 전제로 한다는 샌더스의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바클레이는 선물이 수혜자의 가치와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unconditioned, 그렇다고 선물 받은 사람이 되갚을 답례의 의무가 없다unconditional는 함의가 반드시 따라오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행위들’이 지닌 문제점은 선물의 수혜자가 지닌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에 ‘유대인의 민족적 특권’이라는 또 다른 가치 규범을 더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왓슨은 바울 신학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무조건적 약속’(창세기)과 ‘(조건부 약속으로서의) 시내산 율법’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구약(토라)에 존재했던 것이고, 바울의 신학은 구약에 존재하는 양극성과 화해시킬 수 없는 긴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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