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후반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육과 영의 대조는 5-6장이 단순한 도덕교훈 모음집이 아니라 3-4장에 기술된 신학적 논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영이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율법은 살리는 힘이 없다는 바울의 언명(3:21)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새로운 생명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 정체성은 단순히 참 생명뿐만 아니라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의 새로운 삶에서 구현된다.

생명은 죽음의 극복만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다

구체적 모습을 가지지 못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은 반드시 새 창조로 이어진다(6:15).

새롭게, 영에 따라, 영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이 새 창조이다.

구원의 확신만으로는 새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체현되지 않는 ‘믿음’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삶(6:14)으로 연결될 수 없다.

삶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으로 실현되지 않는 믿음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영 안에서 영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갖추어 살아나갈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은 율법을 통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5:1)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5:6)이, 그리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5:13)와 "이웃 사랑과 율법의 성취"(5:14)가 더 구체적인 공동체 안의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를 6장에서 보게 된다.

‘영적인 사람들’은 "온유의 영"(영의 열매 중 하나)을 가지고 범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수해야 한다.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같은 잘못을 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 따르미들은 영의 열매인 온유한 태도로 공동체 일원의 잘못을 교정하고 보수하며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사건’은 언약과 동일한 기능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사소한 불순종이라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제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법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극한 긴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이해되었는데, ‘예수의 가르침’, ‘이웃 사랑의 계명’,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되고 성취된 율법’,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새롭게 제정된 규범적 삶의 패턴’이 그것이다

믿음의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며,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사건’ 자체가 일종의 규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1:4),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는 사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현해 내는 것이 당연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이러한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분별력을 발휘하여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받은 호의에 최선을 다해 감사로 보답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경제 윤리이다.

바울은 자발성과 호혜성互惠性을 강조한다.

구약은 물론 신구약 중간기 유대 문헌과 신약성서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공평과 정의의 신이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틀 아래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는 자비가 자리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한 번 믿으면 영원히 문제없음’이라는 신념은 바울의 생각에서 멀다. 신자도 최종 심판을 받는다.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고 잘한 일에 보상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신학적 논증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설득하려는 그의 의도로 버무려져 있다. 논쟁으로 가득 찬 글에서 ‘순수한 사실 진술’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 그러나 수사적 논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언제나 틀림없이 작동한다. 한없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스스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6:7). 하나님의 엄정한 통치 원리를 애써 외면하며 스스로 설득해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영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육신을 향해 씨를 뿌리는 이는 썩음을 거둔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특히 10절에서 "시간이 되는 대로/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자고 독려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선행의 대상과 때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여야 한다.

"이 세계가 나에 관한 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나도 세상에 관한 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세상과 ‘나’ 사이에 서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세상과 ‘내 자아’가 단절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합체는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작업은 당연히 ‘온 세상을 다시 만듦’,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짐’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온 세상에 대한 당신 주권의 재천명의 빛에서 볼 때 사실 이 편지 대부분을 채운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태생을 고려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신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바울은 이름 짓는다.

복음은 우리 삶의 규범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영에 맞추어 살면서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걷고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바울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올바른 잣대, 즉 그리스도 안의 규범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고, 1장 8-9절에서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