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들이 바울 복음과 다른 메시지를 전했으므로 저주의 대상임을 암시하는(1:8-9) 동시에 ‘사악한 눈’의 저주를 내리는 자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의 두려움을 건드려, ‘할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불신하도록 유도한다.
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인간 안에 내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바로 ‘영’이라는 것이다. 오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갈라디아인이 도저히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은, 그들이 듣고 믿어서 ‘영’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 시작한 갈라디아인의 새로운 삶은 ‘영’ 안에서 영위되어야 하고 ‘영’으로 마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이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와 같이 ‘육’에 의지하는 것은 틀렸다고 바울은 지적하는 것이다.
3장과 4장을 아우르는 뚜렷한 주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3:7에서 바울은 "피스티스에서 비롯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못을 박는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책에 기록된"이라는 살짝 다른 표현을 덧붙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자체보다는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율법의 완벽한 준수 없이는 모두 저주에 떨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당대 유다이즘의 보편적 신념을 통해서도 확증될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갈라디아 신자들을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설득에 있어 사람의 감정, 특히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바울의 논증이 지니는 정합성 자체보다는 바울이 청중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유대인 출신 예수 따르미이자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개진한 저주 모티프를 이어가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려고 가장 적절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 ‘영의 약속을 피스티스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창세기에 나오지 않는 바울만의 새로운 해석이다. ‘영의 약속’은 ‘약속, 곧 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곧 ‘영을 받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사건’을 고대의 묶는 주술에서 자주 쓰인 ‘주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표현한 점(1:4), 이중으로 저주 걸기(1:8-9),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정죄당한 일(2:11),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을 악한 주술사로 묘사한 것(3:1)이 차곡차곡 쌓인 가운데 3:10에 이르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주 모티프는 갈라디아 청중의 두려움을 겨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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