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는 그러한 분에 신뢰를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 그리스도를 계시하셨고, 신자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4:19),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실제 연합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다이즘이 지닌 흠결을 굳이 찾자면 유다이즘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바울의 눈에 보인 유다이즘의 유일한 흠결은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세한 논리 전개가 생략되어 있어서 현대인의 귀에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지만 바울은 빈번하게 이와 비슷한 흑백논리를 전개하곤 했다. 그의 단호한 흑백논리 역시 회색지대 따위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극단적 대조는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 두루 등장한다(자유와 노예, 영과 육). 바울복음을 따르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든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말이다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복음이 가져다준 효과이자 혜택이라면, 율법을 통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러한 혜택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대 유다이즘은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통해 ‘다가올 세상’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 내는 종교체계가 아니라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선행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기반을 둔 ‘은혜의 종교’였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을 자력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 일체로 확장해서 해석하는 전통은 바울이 실제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이유를 당대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서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다.

‘새 관점’에도 다양한 결이 있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것은 유대인 신자들이 지닌 유대민족 중심주의나 배타주의를 겨냥한 것으로서, 이방인 신자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신학적 논거와 논리가 탄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저주 모티프 등 갈라디아 신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여러 방편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적대자의 영향권에서 빼 내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바울은 ‘must not’이라는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must not’을 주장한 것은 신학적으로 도출된 필연적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자식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른 선교사 그룹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사회적’이며 실리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명료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