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 없이는 어떤 것도 즐길 수 없다.
심지어 교만까지도.

돌 맞아 죽은 선지자는 싸움꾼이나 헤살꾼이 아니다. 그저 사랑을 고백했다가 채인 사람일 뿐이다. 선지자는 늘 짝사랑으로 괴로워한다.

대중은 저속한 작품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특정 부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부류의 문학 작품보다 더 저속하든 더 고상하든 대중은 그 부류의 문학 작품을 더 좋아한다. 이런 취향을 비상식적이라거나 무분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류가 서로 다른 문학 작품 간의 경계는 눈물과 웃음의 경계만큼이나 생생하고 실재하기 때문이다.

저속한 희극 작품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비극 작품도 좀 읽어 보라고 말하는 건 추워서 몸을 덜덜 떠는 사람에게 밍밍하지만 따뜻한 커피 대신 최고급 얼음을 건네는 것만큼이나 분별없는 짓이다.

무언가의 진가를 알려면 그 대상을 고립시켜야 한다. 설사 그 대상이 고립이 아닌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탑을 바라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명의 여성을 뒤따르고, 신앙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별을 경배한다.

저속한 희극 작품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비극 작품도 좀 읽어 보라고 말하는 건 추워서 몸을 덜덜 떠는 사람에게 밍밍하지만 따뜻한 커피 대신 최고급 얼음을 건네는 것만큼이나 분별없는 짓이다.

무언가의 진가를 알려면 그 대상을 고립시켜야 한다. 설사 그 대상이 고립이 아닌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탑을 바라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한 명의 여성을 뒤따르고, 신앙을 노래하는 시는 단 하나의 별을 경배한다.

억압당하는 자를 구하려면, 얼핏 상극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억압당하는 그를 몹시 비참한 존재로 여기는 동시에 몹시 매력적이고 중요한 인물로 여겨야 한다.

낙관론자들은 개혁을 두고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비관론자들은 개혁을 가리켜 가망 없다고 말한다.

억압당하는 자를 구하려면, 낙관론자도 되고 비관론자도 되어야 한다. 그를 가리켜 벌레같이 비참한 존재요 신과 같이 존귀한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은 다양성을 장려한다. 사랑은 개성을 향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서로 좋아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증오다.

현대 국가들은 서로를 싫어하면 할수록 순순히 서로를 뒤좇으며 모방한다. 본디, 모든 경쟁은 맹렬한 표절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

솔직한 거짓말쟁이가
그렇지 않은 거짓말쟁이보다 훨씬 낫다.

솔직한 거짓말쟁이란 전에 한 거짓말을 털어놓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사실, 내가 월요일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어"라고 수요일쯤 털어놓는다. 항상 너무 늦지 않게 진실을 밝힌다. 따라서 전에 했던 거짓말이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서 흉측한 비밀이 될 일이 없다. 묵은 거짓말을 가슴에 끌어안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어떤 장소를 영원히 기억하려면, 그곳에서 한 시간 동안 살면 된다. 그 장소에서 한 시간 동안 살려면, 한 시간 동안 그곳을 잊어야 한다. 눈을 감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불멸의 풍경은 안내 책자가 시키는 대로 바라보았던 풍경이 아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우리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풍경이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가령 죄라든가 연애라든가
유치한 고뇌 따위를 생각하면서 걷느라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던 풍경들.
그때 보지 못했기에
지금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칭찬하며 감탄해 마지않는 추종자들조차
칭찬하지 않는 기질마저
칭찬하고 추켜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허영심의 가장 고약한 면이다.

바보짓을 하다 들통나서 진땀 나는 상황을 모면하려면, 약간의 굴욕감은 견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다.

첫째, 악마처럼 오만한 태도로 버티기.
둘째, 눈물을 흘려 동정심에 호소하기.
셋째, 다 장난이었다는 듯 껄껄 웃기.

전제 정치의 죄와 슬픔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너무 많이 사랑하면서
너무 적게 신뢰하는 데 있다.

철학자는 자신이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드러내지 않고는
호박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에 관해서도 입을 열 수 없다.
그러나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에 관해서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살인자들은 인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기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이는 목숨을 희생시켜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더 충만해지는 느낌을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삶 자체를 증오합니다. 다른 이들의 삶 못지않게 자신의 삶도 증오하지요."

우리가 자라면서 교훈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는 교훈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비도덕적이어서다.

아이들은 인간이 좋은 의도를 가진 나쁜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의도를 가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순전한 도덕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저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분하려는
건강하고, 진심 어리고, 훼손되지 않고,
끝이 없는 욕구.

용감한 사람들은 다 척추동물이다.
겉은 부드럽고 가운데는 단단하다.
겁쟁이들은 다 갑각류다.
겉은 단단한 껍질로 덮여 있고 안은 부드럽다.

실수가 범죄보다 위협적이다.
한 가지 실수가 많은 범죄를 낳기 때문이다.

비관론은 생이 너무 짧아서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나,
종교는 생이 너무 짧아서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진실을 말한다면,
그가 말할 첫 번째 진실은
자기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다.

입 밖에 내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한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누구나 다 아는 ‘뻔한 말’이다.

공통성이란 성인들과 죄인들,
철학자들과 바보들에게
두루 통하는 공통된 성질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는 과학이 과학적이길 바란다는 이유로 과학을 공격한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과학과 철학을 뒤섞으면,
이상적 가치를 모두 잃은 철학과
실용적 가치를 모두 잃은 과학이 나올 뿐이다.

나는 나를 죽일 음식이 이 음식인지 저 음식인지 의사가 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하는 건 철학자의 몫이다.

"사실이 허구보다 더 낯선 법입니다.
허구는 인간의 마음이 창조해 낸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 쏙 들게 마련이니까요."

희망은 청춘과 함께하고 청춘에게 나비의 날개를 빌려준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청춘에게는 주지 않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청춘은 특별히 서정적이고 열광적이고 시적일 수 있는 시기지만, 절망적일 수도 있는 시기다. 이야기가 하나 끝날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일을 겪든 희망을 품는 힘,
모험을 견디고 우리 영혼이
끝내 살아남으리란 걸 아는 지식,
이 위대한 영감은 중년에 찾아온다.

요즘 철학자들은 사랑과 싸움을 갈라서 정반대 진영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싸움이, 싸움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픈 마음이 없이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싸워야 할 이유가 없으면 싸울 수 없다.

지금은 정말로 행복하다. 사람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그게 당연한 거였다. 나란 존재는 만물보다 더 나은 동시에 더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낙관론자의 즐거움은 만물의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어서 평범하고 지루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신의 조화造化에 비추어 본 만물의 부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어서 낭만적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학문의 쓰임이 아주 다양하지만,
주된 용도는 부자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글자를 잇고 기워서 긴 단어를 새로 만드는 데 있다.

명성이나 돈을 거머쥐리라는 희망 없이,
심지어 잘해 낼 거라는 보장도 없이
어떤 일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 일을 통해 손에 넣을
보상을 좋아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그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철학과 신학이 뭔가 특별하고 지루하고 학리적인 분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유일하게 대중적일 뿐만 아니라 천박하고 시끄럽다고 할 만큼 통속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황당무계한 헛소리일 뿐이다.

적어도 우리가 어떤 이를 사랑할 때는 우리가 그에게 받는 느낌과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이에게 받는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독교회는 내 영혼의 실질적인 선생이되, 이미 죽은 스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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