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규정하는 것과
법이 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쁜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해 좋은 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쁜 법을 저지하기 위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지적 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지극히 영적인 죄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에 매듭지은 일뿐만 아니라 최근에 매듭지은 일까지 뒤엎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한 ‘사상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언론은 결정을 밀어붙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대중을 선동한다.

지금 정말 필요한 건 잘못된 결정을 무효로 돌릴 강단이 있는 지도자다.

그리고 이것이 힘을 가늠하는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온 우주를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위대한 문학 작품은 모두 은유다.

《일리아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전투이기 때문이요,

《오디세이아》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여행이기 때문이요,

욥기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요즘, ‘논리’라는 것이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실, 대부분의 논리는 방어하는 데 쓰는 무기이지 생산하는 데 쓰는 도구가 아니다.

지적 체계를 쌓는 사람은 느헤미야처럼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흙손을 들어야 한다. 탄탄한 체계와 상상력이 흙손이라면, 논쟁은 칼이다.

실제로 광범위한 지적 활동을 경험하다 보면, 논리라는 것이 주로 논리학자를 무찌르는 무기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비결은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미치광이는 조그마한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0분의 1의 진실 안에 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야기나 어떤 음모,
또는 어떤 관점 밖에 있는 우주를
상상하지 못한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진가를 알아보지만,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이 이야기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우주를 이해할지는 몰라도 자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아는 그 어떤 별보다 더 멀리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나 너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앙 아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이름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잊었다.

우리가 상식, 합리성, 현실성,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실히 잊어버렸음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정신, 예술, 황홀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 기억한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그저 인간일 때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을 때뿐이다.
땅을 풍경 삼아 서 있으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되고,
집 앞에 서 있으면 그 집의 주인이 된다.
인간들이 연대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죽음과 영계靈界가 존재감을 강렬하게 내뿜는 곳뿐이다.
마음에 스며든 신성한 어둠을 떨쳐 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아주 분명해진다.

예술은 인간의 독특한 특징이다.

인간은 늘 길을 잃었으되,
이제는 찾아갈 주소마저 잃어버렸다.

늘 뒤꽁무니를 보고야 무엇이 지나간 줄 아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실체를 깨닫는다.
해 질 녘에야 그날 일을 상기한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짧게 줄이는 게 문학이다.
요즘 철학책들이
문학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된 이상理想을 추구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이상에 눈을 돌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싫증이 날 만큼 기독교를 탐구한 적도 없다.
사람들은 정치적 정의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정치적 정의를 기다리다 지쳤을 뿐이다.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고,
나쁜 소설은 저자에 관한 진실을 들려준다.

평범한 사람들만 기이한 것에 기습당한다. 기이한 사람들은 기이한 것을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순간이 훨씬 많으나, 기이한 사람들은 늘 삶이 따분하다고 불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 성경 대부분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고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등장인물 중 유일한 주인공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인간이 해와 달을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듯이,
인간은 종교 역시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다.

욥기가 지적으로 아름다운 건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 말이다.

아무리 광기를 끌어올려도 현대 궤변가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이상은 없다. 오래된 이상 중 하나를 완성하는 게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어느 날, 케케묵은 격언이 현실이 되면 지축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해 아래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은 단 하나, 해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슬픈 일을 겪은 사람이 음울한 철학을 갖게 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슬픔과 비관은 정반대다. 슬픔은 무언가에 가치를 두어서 생기지만, 비관은 그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질고 잔인한 일을 많이 겪고도 누구보다 세상을 낙관하는 시인들을 자주 보지 않는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그들은 늘 인생을 낙관한다.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역겨울 지경이다.

시인은 보통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뛰어넘는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위에 올라선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묘하고 칙칙한 것을 모두 편견이요 미신이라 매도한다.

과똑똑이는 사람들로 바보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시인은 사람들로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시인은 종종 돌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평범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과똑똑이는 대체로 땅을 차지하고 왕관을 쓴다.

현대 세계 전체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다.
실수를 계속하는 게 진보의 일이고,
그 실수를 바로잡지 못하게 막는 게 보수의 일이다.

자아는 메두사다.
허영은 다른 사람의 거울 속에서
메두사를 보며 살고,
교만은 혼자 메두사를 연구하다가
돌로 변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근간을 뒤흔든 크나큰 실수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섞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꿈꾸는 ‘이상’에 맞춰 이 세상을 계속 변화시킨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상을 바꾸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비록 느리더라도 사람들 가운데 정의를 구현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는 정의와 자비의 타당성을 즉각 의심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새 예루살렘이 계속해서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상에 맞춰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에 이상을 바꾼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권력을 이해하는 열쇠는 간단하다.
그들은 항상 진보 쪽에 서려고 애쓴다.
항상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다.
상류 계층에게는 참 쉬운 일이다.
상류층에게 새로움이란 필수품에 가까운 사치품이다.
과거와 현재가 너무 따분한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미래를 노려보며 아가리를 한껏 벌린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든,
우리가 내놓은 지혜로운 말은 이 세상 몫이나,
우리가 내뱉은 어리석은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몫이다.

재산은 민주 국가의 예술이다. 모든 인간이 하늘의 형상을 따라 하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나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론은 언제든 들불이 될 수 있다.
이견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들불.

견해 차이 못지않게 무관심도 신성하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잊힌 듯하다. 대중의 무관심 역시 하나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여론은 대개 현명하다. 모든 사람에게 ‘미네랄 섭취’에 대해 투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치자. 투표용지가 한 장도 수거되지 않으면, 나는 아마도 시민들이 투표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은 이미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무성한 나무처럼 사방팔방 잘 자랄 수 있는 사람은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서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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