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예배가 한 주간의 중심이다.

예배란 성경이 우리가 한 주 동안 텍스트로 삼고 살아가야 할 권위적인 책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로 우리의 집단적 삶을 재구성하고, 서로를 경쟁자나 위협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만나는 행위다.

목사의 소명은 사람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게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떠올렸다

성경은 "날마다 죽노라"와 같은 비유적 의미에서든,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와 같은 사실적 의미에서든, 죽음에 많이 집중한다.

부활은 우리가 묻히거나 화장된 이후의 일하고만 상관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과 상관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활은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 상관이 있다.

"무덤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죽음을 연습한다. 그러한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부활을 살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처음으로 죽음을 암시받는 행위다. 먼저 죽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

목회는 자기 자신이 주목받으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려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장 목회를 잘하는 것이지.

이 소명을 건강하게 지키려면 끊임없는 자기 부인, 자기 감춤이 필요해

목회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익명성을 가지고 있는 일인데, 그 익명성이 오히려 복이지

목사들의 경우, 쉽게 눈에 띄면 눈에 띄기를 원하게 되거든

오래 전에 친구 목사가 내게 목사의 자아에는 ‘질병의 악취가 있다.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자아의 냄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어.

세례식과 장례식은 이 제거의 과정에 유익하다. 목사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례식과 장례식에서 목사는 부수적인 존재로까지 비쳐진다.

모든 관심과 감정은 세례를 받는 사람, 묻히는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는 것이고, 권리의 포기이며 죽음이다. 그렇게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천하는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례는 부활을 증언하는 죽음이다. 세례식에서나 장례식에나 목사는 전면에 나서지도 중심에 서지도 않는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처음에 그 시편을 기록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거칠고, 현실적이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할 만한 면이 거의 없고, 전혀 경건하지도 않다.

히브리인들이 기도할 때 사용한 언어는 그들이 자녀를 꾸짖을 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산과 강과 독수리와 비둘기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불의와 배신에 대해서 신랄하게 불평할 때 썼던 언어와 똑같았다

기도를 위한 특별한 언어가 따로 있고, 나머지 것들을 위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았다. 사업상의 언어, 사회의 언어, 길거리 언어, 기도 언어가 다 같았다.

나는 두 언어의 세계에서 살았다. 성경 언어의 세계와 현대 언어의 세계다

나는 날마다 두 언어의 경계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축복하시고,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데 쓰시는 성경의 언어를, 우리가 잡담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길을 안내하고 사업을 하고, 노래를 하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데 쓰는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다.

"친밀함이지. 모든 사람의 이야기에 우리가 한 부분이 되고 그들이 우리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는 친밀함 말일세. 평범한 삶과 구원의 삶이 뒤섞여 있는 그 일상이 그리울 거고, 기도로 발전되는 대화가 그리울 걸세. 이 문화의 세속성과 개인주의를 은연중에 뒤집는 예배와 환대도 그리울 거고.

이야기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언어의 방식이다.

내가 기준으로 삼고 사는 텍스트인 성경은 이야기로 전해진 삶의 방식에 오래, 깊이 잠기는 책이다.

이야기는 사람을 그들이 하는 일로 축소하거나, 그들이 일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축소하거나, 그들의 외모로 축소해서는 그들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언어의 방식이다.

이야기가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듣기와 말하기가 동등하다

이야기는 언어를 사용해서 패턴과 의미를,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선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발견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작위적이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경험과 꿈, 임무와 노래, 약속과 배신 속에서 단어와 문장은 환대의 자리마다 이야기를 감지하고 드러내고 구성한다.

예배는 오락으로 대체되었고, 통계가 케리그마를 이겼다.

이야기는 언어를 사용해서 패턴과 의미를,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선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발견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작위적이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경험과 꿈, 임무와 노래, 약속과 배신 속에서 단어와 문장은 환대의 자리마다 이야기를 감지하고 드러내고 구성한다.

예배는 오락으로 대체되었고, 통계가 케리그마를 이겼다.

목사는 고유한 소명이라네. 더 낫다거나, 특권이라거나,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볼 때 고유한 소명이고,(그만큼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고유한 소명일세.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소명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다네.

그러한 고유성 중 하나는 다른 소위 전문직보다 우리 직종이 훨씬 더 많은 실수를 한다는 것일세.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많은 경우(늘 그렇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라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예수님을 따를’ 때의 느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네.

교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이 소명으로 인해 우리가 서게 된 자리는 곧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증언하라는 뜻이기도 하다네. 구원과 거룩함의 신비를 살아내라는 뜻이지.

이렇게 모호함 가운데서 내게 좀더 분명한 길을 제시해 준 시편의 구절은 바로 이것이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현재의 맥락에서 내가 생각하는 ‘교만한 자’는 ‘자신의 일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목사들이라네.

내가 목사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게 해준 것 두 가지는 예배와 가족이었다네.

매주 회중과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내 중심을 잡아 준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네.

예배를 희석시키거나 예배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허락될 수 없었네.

또한 가족은 내가 날마다 실천하는 희생적 사랑이 현실적이고, 신실하고, 인격적일 수 있게 지켜 주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랑의 삶에서나 너무도 공개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 준다네.

그렇게 공개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우리는 허세를 부리며 살 수도 있고, 자신감은 넘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용감하게 친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 수도 있다네.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본다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반응하는지를 사람들은 보고 그것에 따라서 좋게 혹은 나쁘게 영향을 받는다네(우리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 바로 주일 예배일세).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은, 예배든 가족이든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일세. 너무 애를 쓰면 오히려 자의식이 생기고, 우리의 자아와 실행력과 명성이 우리가 실제로 헌신한 일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네.

목회의 소명이 실현되는 일차적 맥락인 회중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