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에게 목사와 작가는 하나의 정체성의 양면이었다. 목사라는 소명에 작가를 덧붙인 것이 아니고, 작가라는 소명에 목사를 덧붙인 것이 아니었다.

요한에게 작가와 목사는 같은 것이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는 요한의 그러한 면을, 즉 그가 목사이면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걸을 때 오른발, 왼발 하듯이 그는 목사, 작가였다.

영성 신학이란 실제로살아내는 신학이며, 글을 통해 삶의 기층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다.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내 글쓰기는 곧 성경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은 회중과의 대화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즉 신비로 천천히 들어가는 글쓰기였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탐험하고 발견하기 위한 글쓰기.

언어 안으로 내가 들어가고 언어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글쓰기.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되어 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혹은 알아채지 못했던, 혹은 숨어 있던 것을 창조해 내는 글쓰기

집중하기 위한 글쓰기. 기도의 행위로서 글쓰기. 황무지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내 목회 소명에 동화되어 관계의 내면을 드러내 주었고, 신비로 나를 데려가 주었고, 상상력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 성경의 언어세계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경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게 훈련시켜 주었다.

그 글쓰기는 우리 회중의 언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언어의 신성한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목사로서 내가 하는 일은 온통 언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언어와 상관이 없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계시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가르치셨고, 기도하셨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여하고 믿고 듣고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삶의 방식은 무엇보다도 현장 중심적이고 인격적이다.

기도의 삶이다.

언어는 말로 하고 글로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한 우리 회중에 속한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도 들어야 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언어의 상당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리고 분명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삶 전체라는 것이었다.

버리면, 특히 하나님, 예수님, 기도, 믿음과 같은 말들을 대상화시켜 버리는 불임의 생명력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 얘기’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황무지의 시기 동안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목사와 작가의 공통 기반은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모든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언어는, 모든 진정한 언어는, 도서관에 소장될 법한 정보와 지식을 정확하게 말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교제에 더 가깝다.

진정한 언어는 생명을 지향하는 관계를 맺는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 용서와 구원과 정의가 그 안에 있다.

진정한 언어는 혀와 귀가 다 필요하다.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글에서 내가 배운 것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얘기-즉 인격이 제거되고, 관계가 없고,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언어-는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다

목사와 회중은 자신들이 언어를, 이 신성한 언어를, 이 하나님의 말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나는살아내는 신학과 성경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글쓰기를 통해 목회적 삶의 기층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반복하거나, 따라하거나, 맥락 없이 증거 본문을 대지 않는다. 그 글을 쓰고 있는 요한 안에서 성경이 재창조되었다.

그는 성경을 완전히 소화했다. 살아낸 성경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살아낸 것을 글로 쓰고 있다. 그의 책은 결코 ‘받아쓰기’가 아니다.

내 경우 그 이야기는 소명에 따르는 성숙의 과정이다.

내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 문구는 ‘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하기’이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언제나 결국에는 생겼던 결과는, 인생이 가치 있어진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기독교적 삶의 실천 가능성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실제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일과 죄, 가정과 이웃의 혼란 속에서 내 임무는 기도하고 방향을 안내하며 복음을 실제로살아내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인내하며,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말이다.

인내하며: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머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빠르게 혹은 쉽게 할 방법이 없다.

현장에서: 나는 경제, 날씨, 문화, 학교 등, 이곳의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의 그 어떤 면도 추상화되거나 경건하게 이상화되지 않게 할 것이다.

인격적으로: 나는 그들을, 그들의 이름과 집과 가족과 그들의 일을 알 것이다. 그렇다고 사생활을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프로젝트나 대의명분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계시에, 구원의 이야기에 우리를 집어넣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그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거기에 순종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형성하신 믿음의 공동체다.

우리가 서로를 기능이 아니라 이름으로 알고 사귐으로써 함께하는 삶의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어떤 책임을 맡느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게 되는가의 관점에서 예배하는 회중의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믿음에 대해서, 의심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심리 조작이 없는 예배. 프로그램이 없는 공동체. 내가 목사로서 정말로 즐거워했던 것은 이러한 모호함의 상태,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서서히 얻게 되는 통찰과 하게 되는 결심은 신앙의 고백으로 발전되고, 사전 계획 없이 ‘서로’ 자발적으로 가지는 관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환대의 문화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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