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택한 멘토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그리고 프레더릭 폰 휘겔(Frederick von Hugel) 남작이었다.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목사, 너무 많이 아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영혼을 ‘이하동문’으로 취급하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기도, 기도와 성경의 결합이었다.
성령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성경)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기도)을 융합하셔서 그것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삶을 형성하신다.
새로 안수를 받은 신학교 졸업생이 그를 찾아와 그가 세인트 조지 장로교회의 목사직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제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로서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자주 화장실에 가고, 휴가를 길게 가십시오."
그런데 이제 내가 목사가 되어 황무지에서 생존하는 법을 찾는 입장이 되자 감정으로는 내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혹 목회의 차원에서 사람들 안에 인위적인 감정을 조작해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자란 교회 문화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점검하는 것이 자기 삶에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영혼은, 자신의 영성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아니면 뜨거운지를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내장 온도계였다.
모든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을 향해 ‘불 붙어’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그리고 특히 설교는 타들어 가는 장작에 불을 더 키우는 부채질 같은 것이었다.
당신들은 악을 희화화해서 자기 가정이나 일터에 들어설 때마다 거기에 엎드려 있는 악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려 해요.
아니면 아예 그 존재를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에 이름을 댈 수 있는 죄목을 붙여서 일망타진하려고 들지요
테레사와 요한은 반대편 끝에서 작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기도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의 방식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개혁하고자 했다.
루터와 칼뱅이 성경과 바른 믿음에 관심을 두었다면, 테레사와 요한은 영혼과 바른 기도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앉아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 혹은 교회에 가고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듣는 것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 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친구, 일터와 동료, 꿈과 환상, 애착의 대상, 손쉬운 만족의 방법, 친밀한 관계의 비인격화, 살아 있는 진리를 소모품으로 축소하는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을 가져다가 정제하는 불의 제단에 놓고-우리 하나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다!-그것이 전부 거룩한 삶을 위해 구속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목사로서 내가 성경과 진리만큼이나 영혼과 기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진리가 일상과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터와 칼뱅은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 일을 아주 잘 해냈다.
테레사와 요한은 자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정직하고 분별 있게 다루려고 노력했고, 우리가 성숙하고 거룩해지려면 모호함과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대로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요구에 맞게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에 맞게 하나님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건 못하건, 좋아하건 말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에 몰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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