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더 많은 일들이목회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중에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단절된 행위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중에 우리가 하는 일들-무작위적이고 단절되어 보이는 기도와 이야기와 고통과 거절과 공동체-과 일요일 사이의 내적인 연결성을 보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비인격화할 때마다 복음은 약해지네.

특히 규모는 정말로 잘 비인격화시키지.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네.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줄어든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숙해지는 유일한 길은 친밀감, 포기, 그리고 인격적 깊이뿐이라네.

목사는 그와 같은 성숙을 양육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네.

그러한 일이 큰 회중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무지 애를 쓰며 결을 거슬러 가야만 한다네. 큰 규모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되기 때문일세.

군중은 과도한 술과 비인격적인 섹스만큼이나 철저하게 영혼을 망친다네.

초월성을 느끼게 해주지만 하나님을향하게 하는 초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멀어지게 하는 거짓 초월성이라네

종교적인 굶주림은 만족을 모르는 자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네.

회중을 규모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는, 군중이 아닌 공동체로 전략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키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아마 목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소명이지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소명과 직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예술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눈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부주의한 눈으로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목사로 고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사의 일차적 책임은 내가 섬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우상을 종종 선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