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문제로 대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그들을 부르는 목사였다.

내 회중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회중은 자신의 집단적 문제로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회중은, 자신들이 인식하건 못하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살아 있는영혼이라는 사실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귀하게 대하고 존중해야 하는 신비다.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로, 있는 모습 그대로 알려지는 회중 안으로 사람을 맞이하고 반기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공동체에서 목사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나의 일은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너머를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해서 반응하려고 했다.

켈트식의 십자가와 성만찬 탁자와 세례반과 강단은 우리가 보거나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치료나 문제 해결이나 사람을 고치는 것은 우리와 관련된 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온전해지고, 우리가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의 삶을 여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었다.

일요일의 의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관찰 그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회중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지금 모습 그대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보기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회중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희생적인 삶을 살겠다는 대단한 열의를 가진 사람들의 예외적인 모임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고린도 회중을 설명한 것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오직 신비로서만 그것을 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내 회중을 문제로 대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을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사로서 그들을 대할 때는 나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나는 신비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을 대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은 없다. 목회적으로 돌보려면 그러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회중을 문제로 규정하고 그렇게 대하는 습관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손 써 보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도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의뢰하기 위해서, 그들을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서서히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목사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축소시킴으로써 나는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목사의 소명을 배제시켜 버렸다.

회중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일인데 그것을 명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꽤 자주 말이다.

성장이 대체로 느리고 한동안은 그 성장이 보이지도 않을 회중의 모호함을 안고 살아가겠는가? 진단할 수 있고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감정적인 만족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구원과 거룩함의 신성한 신비를 함께 탐험하는 동료가 될 것인가?

오랜 잉태 기간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다시 보게 된 소명이었다. 그 소명에서 회중이회중으로 회복된 것, 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 규정하는회중으로 회복된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단호한 결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리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속화의 시대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변적 존재다.

하나님은 선하지만(혹은 그다지 선하지 않지만)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혹은 감정 때문에 도움을 받고 싶을 때 그들은 보통 자신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소명에 진실하다면, ‘시장’이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방법을 찾을 것이고,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것이다.

보통은 조용히 그리고 종종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복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사다.

자신의 옛 도시 회중과 나의 비(非)도시 회중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본질은 지리나 인구 통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과 현존이 두 회중 안에 똑같이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에 매여 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의 일터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요일에나 월요일에나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우리 회중에는 혹은 지역사회에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우리가 회중의 기대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같은 목사였지만 일요일의 그 분명한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일요일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 주고 나머지 6일 동안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규정해 준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기도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것 말이다. 예배당에서건 길거리에서건, 내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대화와 교차해야 했다.

동료 목사회에서 처음으로 합의한 것은목사의 소명을전적으로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성경 본문을 통해서 목사와 예배하는 회중은 구원 공동체로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

목사와 회중, 그것이 바로 우리 관계의 본질이다. 설교와 가르침, 찬송과 기도, 세례와 성만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 그리고 성례전이 목사와 회중인 우리를 부활의 공동체로 형성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홍해에서 성취된 구원의 축제인유월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탈무드 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서 역할을 한 아가서와 짝을 이룬다.

시내 산에서 계시로 받은 율법을 축하하는오순절은 룻기와 짝을 이룬다.

구원의 삶을 어떻게 일상적인 나날의 삶으로 끌어오는가?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현존하신 사건이다.

기도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현존하게 해주는 행위다.

성과 성전의 상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상실로까지 보이는 사건을 슬퍼하며 금식하는아브월 9일은 예레미야애가와 짝을 이룬다.

예레미야애가는 적막함과 상실감을 쏟아 내며 고통의 경험으로 깊이 들어가는 책이다.

성도들과 함께 그 고통을 직면하지요. 고통 가운데 인내하며 그들의 동료가 되어 줍니다.

성막절에는 옥상이나 마당에 성막처럼 임시 공간을 설치해서 광야 생활을 재현한다.

성막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전도서다.

거절하는 연습이다. 목사들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니다.

부림절에는 페르시아에서 대학살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축하하고 즐긴다

부림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에스더서다.

구원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다. 목사는 개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관심을 둔다.공동체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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