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도행전의 패턴을 따라서 교회로 형성되려면 사도행전을 안내서가 아니라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 안에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유한 특징들을 가진, 형성 중인 우리 교회도 설 자리가 있는 이야기로 말이다.
그대로 따라하는 청사진이 아니라, 참여하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야기로서 교회의 모습이다. 누구나 조연을 담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그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벤이 화를 가장 많이 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딱 나를 위한 일이네. 바로 이런 그룹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 아니겠어?’
우리는 이 사람들을 우리가 고칠 수 있는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서 하나씩 알아 갔고, 그들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했고, 강제로 이야기에 참여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에 더 깊이 참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더 넓게 참여하는 일에 미국인들은 익숙하지가 않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언어는 정보로서의 언어, 이름을 짓고 설명하는 언어다.
또한 물건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달나라에 가는 등의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언어다.
하지만 참여로서의 언어는 어떤가? 관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는? 공동체로 사는 역량을 키워 주는 언어는?
카타콤은 그런 언어를 배우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예배 후에 커피를 마시거나 가끔씩은 각자 먹을 것을 싸 가지고 와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는 분위기는 서로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연습을-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제 막 형성되는 교회로서 언어가 사용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을 구별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아니본질적인 이유는 교회에서 언어가 사용되는 일차적인 방식이 예배이고, 예배의 언어는 참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참여의 언어가 취하는 일차적인 형식이 바로 이야기다. 노래와 이야기, 대화와 이야기, 시와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가 스며 있다.
누가는 거의 똑같은 병렬 구조로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누가복음 1-2장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이고, 사도행전 1-2장은 우리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의 탄생 이야기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관련된 모든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이어 나가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성령이 창조하시고 계속해 나가시는 일이라고 보는 전환 말이다.
그 전환은 우리가 계획하고 성취하고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책임지신다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갈릴레오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기적을 주셨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아무런 이해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장소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무력한 아기의 형태로 주신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신 그 세계, 연약하고 주변적이고 가난한 그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
결국 우리는 이야기에 설복당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시작하실 때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시작하신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스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안나와 시므온처럼, 이 세상에 우리의 구원자를 보내시기 위해서 성령이 처음 데리고 일하신 사람들이 그랬다. 그렇다면 구원 공동체인 교회를, 이 회중을 형성할 때 성령이 전략을 바꾸실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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