잰에게 ‘목사의 아내’란 단순히 목사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소명의 차원이 더 깊었다.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잰에게 그것은 섬세한 환대를 베푸는 삶이었다
잰에게 목사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혼잡한 교차로에 전략적으로 거하면서도 요란 떨지 않으며 사는 것이었다
나는 책과 언어와 배움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세계가 그토록 흥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잰에게 푹 빠져 있었다. 감성적이고, 주변의 사람과 사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인생의지금과여기를 즐거워하는 잰을 사랑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 아직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내 속 깊은 데서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배움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리라는 사실이었다.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잰은 자신이 언제나 되고 싶어 했던 사람, 곧 목사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쉐키나는 집단적 비전을 일컫는 히브리어인데, 그 집단적 비전을 통해 흩어져 있던 신성의 파편들이 한데 모이지. 보통은 빛을 퍼뜨리는 현존으로 이해해
말하자면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빛이지. 하나님은 보통 어떤 장소에 계시진 않지만 말이야.
그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이라기보다는, 격려하거나 확인해 주기 위해서 혹은 우리가 아직은 볼 눈이 없는 어떤 것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재량으로 선택해서 보여 주시는 것에 더 가까워.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중세 때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자주 사용이 되었다네.
궁상스러워 보이는 대체물에 그들은 마음이 아파서 울었지. 그들이 울고 있는데 눈부신 빛의 현존인 쉐키나가(하나님의 개인적인 현존이) 내려와서 그 소박하고, 보잘것없고, 가건물 같고, 영광스러웠던 성전에 비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는 성전을 가득 채웠어. 그들은 손을 들어 찬양했지. 이제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 하나님이 정말로 그곳에 계시는 것 같았지. 쉐키나는 서서히 사라졌지만 영광은 남아 있었어.
나의 존재에 딱 맞는 일인 이 소명이 명쾌해지자 기분이 좋았다.
그냥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만들어져 온 나의 존재와 일치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목사의 아내가 된 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바로 회중이다. 나는 그냥 목사가 아니라 한 교회의 목사였다. 성도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사람들이 모인 회중이 나의 일터였다. 나는 그곳으로 날마다 일을 하러 갔다.
내가목사이고,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언제나 목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의 일차적 일터인회중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목사라는 정체성의 인식만큼 분명하지가 않았다
나는그냥 목사가 아니라, 교회의 목사, 회중의 목사였다. 목사는 자율적인 소명이 아니었다. 목사는 하나님과 나 둘이서만 협상한 소명이 아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내 회중에 속한 남자와 여자들이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회중들이 목사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줄 알았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회중에 참여하는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자신들의 영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그들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인도와 격려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오해는 없을 정도로 나는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회중과 내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일은 종교적인 잡다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회를 별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교회는 그냥 삶의 배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내 일터가 되고 나니 이 장소에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들을 존중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일하시는지 깨어서 살펴야 했다
내가 교회에 무관심했던 세월에도, 그리고 문화에 오염된 그들의 기대에도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일면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불순물을 태워 버리려면 상당한 시간을 정제하는 불 가운데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 일터가-이 회중이, 이 교회가-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더 반가운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생겼다. 일터인 내 회중에 대한 실망, 가끔은 이를 갈기까지 하는 실망이, 얼핏 보이는 쉐키나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엉뚱한 것을 찾다가 현재 있는 것을 놓칠 뻔했던 위기의 순간들에 찾아온 빛이었다.
이야기는 결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집합이다.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워야 하며, 모든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환란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하다. 혹은 어울리지 않거나, 화가 나 있거나, 무례하거나, 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것을 피해 갈 길은 없다
우리는 회중이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우리는 플롯의 한 가닥을 잡고 그것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하신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잘나가는 것 같다가 미처 이야기임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부딪히고는 균형을 잃는다. 산란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비틀거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형성하고 성령이 창조하신 희생적 겸손, 놀라운 용기, 영웅적인 미덕, 거룩한 찬양, 즐거운 고난, 쉬지 않는 기도, 끈기 있는 순종의 삶이 거기에 있었다. 쉐키나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시글락이다.
교회는 그 나라가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교회는 죽음의 나라에 세워진 하늘의 식민지요,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게 하는 성령의 전략이다.
나는 교회와 목사의 소명이 사업 운영의 관점에서 재정의됨으로써 가차 없이 축소되고 부패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기대나 세속적인 기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이고 목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모든 생각들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산적한 과제 사이에서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다. 목사와 교인으로서 우리는 함께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초 작업을 해야 했다
예배를 위해 구분된 그 지하실이 우리의 장소가 될 것이고, 우리의 텍스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형성기의 이야기, 첫 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카타콤 예배당에 예배하러 모인 우리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물론 공통된 기반을 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이 되시고, 사역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를 참여시키시고, 자신을 따르라고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라고 남자와 여자들을 초대하신 이야기였다.
갓 세워진 교회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의도했던 바는, 앞으로 우리가 갖추게 될 모습 전부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형성 이야기에 기초해서 갖춰 가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상상력이 사도행전에 완전히 절어서 교회로 세워지는 우리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일에 동참하게 하고 싶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곧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그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이야기다.
물론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우리가 책임자가 된다. 이제우리가 결정을 내린다.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실천한다.
이제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우리가 그 책임을 맡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사도행전을 교회 선조들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회원이 되려면 어떤 진리에 동의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글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는 이야기, 우리도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이야기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야기의 특징은, 일단 우리가 이야기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 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이야기에 참여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탁월한 이야기꾼의 이야기에는 예측 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무의미한 것 또한 하나도 없다. 세세한 부분, 말, 이름,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이야기의 일부다.
이야기의 언어로 교회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혹은 누가 등장할지 혹은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야기꾼이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들려줄 것이라고 믿거나, 아니면 믿지 말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첫 교회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은, 우리의 새 교회도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해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진다는 것과 이번에는 우리가 그것을 듣고, 반응하고, 따르고, 믿고, 순종한다는, 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사도행전은 첫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방해야 하는 대본이 아니다. 이야기는 내러티브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켜 주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계속 의식하게 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삶을 형성하시는 성령의 일에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하게 해준다.
사도행전이 처방전이나 경고가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용한 점은, 예수님이라는 플롯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속한 상황에서 반응하고 순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