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조언하거나 제안해 주실 것이 있습니까?" 그는 없다고 했다.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실 걸세."

모두가 내가 목사가 되는 길에 거쳐 간 정거장들이었다. 하지만 그무계획성이라니….

그런데 이제 한 주 한 주마다, 한 학기 한 학기마다, 조금씩 나의 성경 읽기는 대화가 되어 갔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들었다.

나는 각 단어들이 2 페이지에 있는 다른 모든 단어와 어떤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의(저자의) 음성에 조심스레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언어의 예술가들인 뛰어난 작가, 시인, 이야기꾼이었다. 이사야와 다윗은 시인이었다. 마태와 누가는 서사의 대가였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었다. 말은 거룩했다.

이 경험은 단순히 학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그 강의실에 배어 있던 열정과 인내심은 내 안에 귀납적 상상력을 서서히 주입시켰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에, 오로지 그것에만 맹렬하게 집중하고 문학적 관계와 인격적 관계 모두를 유심히 보면서 습관적으로 맥락, 즉 성경 안에 계시된 창조와 구원이라고 하는 세계 전체를 인식하는 법을 나는 배웠다.

현장 사역을 하면 매주 몇 시간만이라도 평범한 땅에 발을 디디고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평범한 언어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지적인 작업만 하면, 특히나신학 영역에서 지적인 작업만 하면 영혼이 쪼그라들 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심사숙고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경을 강해하고, 과시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정확하고 분명한 언어를 사용했다. 강단의 시인이었다. 그의 설교를 매주 들은 그 해에 나는 단 한 마디의 진부한 표현도 듣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설교와 기도와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결코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대화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도록 했고, 훗날 나는 그것이 바로 목회의 대화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두 시간씩 동네를 다니면서 가정 심방을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설교는 선포이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대화 속에, 듣는 귀와 반응하는 입술에 뿌리를 박아야 비로소 복음이 됩니다."

내가 확실하게 안 것은 그가 설교 준비를 할 때, 부유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훗날 목회를 할 때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바르트를 읽고 있다. 내게 그와 같은 신학자는 처음이었고,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내가 들었거나 읽은 신학은 전부 하나님에대한 것이었다. 마치 토론 주제인 것처럼,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을 다루었을 뿐, 진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휘트먼의 시나 멜빌의 소설이나 체스터턴의 저널리즘과는 얼마나 대조적이던지! 하지만 바르트에게는 진액이 가득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바르트를 읽으면서, 그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고 나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데 우선적으로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르트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증인이었다(증인은 그가 가장 좋아한 단어다). 그는 기독교적 삶, 성경의 내러티브, 복음서의 복음을 실제로살아내는 것에 주목하게 했다.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설교하는 것에 집중했다.

기독교적 삶을 실험실로 가져가 분해해서 작동 원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곳곳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행위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참여하는 것에 그는 관심이 있었다

바르트가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열정은 온통 ‘살아내는 것’에 가 있었다.

"유진, 자네가 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았으면 좋겠네. 자네가 목사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네.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수가 되려하는 것은 알지만, 안수를 받는 것이 좋을 걸세. 동료들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지고, 인정받는 신학적 전통을 확증해 주는 교회가 자네에게는 필요하네. 교수도 목사처럼 책임을 지는 지지 체제가 필요하다네. 교수건 목사건, 전문적인 사역은 독불장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러기에는 압력도 너무 많고, 유혹도 너무 많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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