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한 마리의 4분의 1 분량을 로스트용과 스테이크용으로 자르는 일은 단순히 멍청한 물질에 칼을 가지고 나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의 실재를 존중하면서 정중하게 다가가야 하는 일이었다.
말을 통한 가르침보다는 좋은 예를 보면서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물질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다
그 물질은 돼지고기 엉덩이살일 수도 있고, 마호가니 널빤지일 수도 있고, 진흙덩어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영혼일 수도 있는데, 잘 해낸 일을 보면 거기에는 주어진 조건에 대한 의지의 굴복 같은 것이 있다
훗날 나는 그것이 겸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수든, 도예가든, 시인이든, 기도하는 사람이든, 모든 뛰어난 일꾼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나는 그것을 정육점에서 배웠다.
수년 후에 나는 ‘부정적 능력’이라는 표현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정육점에서 그토록 많이 연습했던 재료에 대한 굴복, 즉 겸손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는 진정한 창의력이 성숙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게 행사하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과 이유를 짜증스럽게 찾아다니지 않고 불확실성과 신비와 의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 목사는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동물 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죄와 용서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알지,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사는 지저분한 일이다. 동물의 피로 철벅대는 바닥에 서서 내장은 따로 분리해서 양동이에 담고, 가죽은 벗기고, 벗긴 가죽은 소금에 절인다. 그리고 여름이면 파리가 사방에 들끓는다.
정육점은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목사가 되어 일터로 삼게 될 회중의 세계를 처음 접한 곳이었다.
내가 목사로서 회중을 이해하게 된 방식은 우리 정육점의 ‘회중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지금은 확신한다. 회중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서는 순간 거리에서 그들을 부르던 이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교회는 결코 상품과 서비스가 교환되는 장소로 축소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에게 꼬리표가 붙여지는 장소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소문이 지속되는 곳이 되어서도 결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람이 이름을 가지게 되는 곳이고, 암묵적으로건 명시적으로건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을 받는 곳이다. 존엄성을 부여받는 곳이다.
그 시절에 아버지의 정육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다른 모든 진실을 위험에 빠뜨릴 만한 큰 잘못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거룩한 쉼이 생략되었다는 사실이다.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것, 비어 있음을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성 토요일에 대한 무지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이었다.
맹렬하게 일하고 큰 보상을 받는 토요일은, 그저 성 금요일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주일의 부활 사건을 이어 주는 다리였고, 모든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기량과 미덕을 드러내는 인간 행위의 서막이거나 결말로 전락하는 날이었다.
앞으로 내 인생의 중심은 일하는 내가 아니라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우기 전에, 먼저 비학습을 통해 치워야 할 것들을 치워야 했다.
부적절한 일, 불안 때문에 하는 일, 두려움 때문에 하는 일은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시는 일을 간섭하고 방해할 뿐이다.
내게 주어진 ‘일’은, 내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인식을 우리의 뼛속 깊이 각인시킬 매일, 매주, 매해의 리듬을 찾고 다른 사람들도 찾도록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선은 성 토요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 다음에는 안식일 지키기였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지 말아야 했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야 했고, 부활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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