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 위로와 충고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려니 번번이 허방을 짚고 만다.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위로,
조용히 몸으로 보여 주는 충고,
달리 무엇이 있는가?

반성은 나중에, 청춘이 다 지난 뒤에 해도 된다. 그때 짐짓 깨달은 얼굴로, 화무십일홍이니 젊음을 낭비하지 마, 하고 잘난 척해도 된다.

‘노’No에 익숙해지고 실패에 이골이 났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만날 꼴등을 한다 해서 꼴등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데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줄 안다.

실패에 적응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모욕을 준다.

지고도 창피한 줄 모른다고 모욕한다. 바보들!

깨지고 모욕당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실패했다고 모욕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진짜 굴욕스러운 건 실패할까 두려워 싸움을 피하는 것.

겁나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

제가 못 먹는 포도는 신 포도라고 박박 우기던 여우처럼, 패배를 부인한 채 비겁하게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옷깃에 얹힌 "쓸쓸"을 알게 된 지금, 부끄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나만 쓸쓸한 게 아니라서 반갑고, 우리가 함께 쓸쓸해서 다행이다 싶다.

나중에 알았다. 어떤 사람이 충고를 듣고 잘됐다면 그건 내 덕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듣고 행한 그의 덕임을. 그가 충고를 구한 게 나만이 아니란 것을. 더구나 내 말대로 해서 잘못된 경우는 내가 싹 잊어버린단 것도.

요즘은 충고를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몸에 밴 습習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서 매번 나 자신에게 충고한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정약용은 철학, 의학, 역사학, 언어학, 법학 등 다방면의 학문은 물론이요, 시 짓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내 길을 가려면 이런 자신감이 필요하다. 물론 실력이 있다는 전제 아래서. 실력은 없이 자신감만 있으면, 어휴…….

죽은 사람을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는 그림이 그려지며,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이 되어 가문 땅을 적시기도 하고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늙은 죽음이 곧 젊은 생이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나중에 만나자고, 남은 이를 위로하는 따스한 유언.

‘인생이 뭐야?’라고 누가 물으면 딱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모르는 일이 아는 일이 되어 흘러갈 때까지 떨고 있는 일이야.

그나저나 나는 좀 더 오래 이 물속에서 떨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아직도 죄다 모르는 일뿐, 도대체 아는 일이 없으니…….

왜 남의 집 불빛들은 그리도 다정해 보이는지, 왜 사무치게 외로울 땐 다들 그리도 부산한 것인지…….
나만 혼자 하염없이 강물을 벗 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구나. 저 강이 저리 붉은 것은 노을 때문이 아니구나. 아무 데도 갈 데 없는 외로운 설움들이, 내 설움 네 설움 한데 어울려 타오르는 까닭이었구나.

밥벌이의 고단함을 겪지 않았으면 끝내 몰랐을 비유들. 몰랐어도 좋았겠지만 기왕 겪은 시간, 그래도 배운 게 있어서 다행이다.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아니 일흔이 되어도 여전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라는 시구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삶은 그런 시간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을 "페이지를 넘긴다"라고 표현하다니. 게다가 ‘달 귀퉁이가 접혀 있다’라고!

아름다운 말은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 시는 참 힘이 세다.

요즘 애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는 줄 알았다. 한때는 나도 ‘요즘 애’였다는 걸 잠시 잊었더랬다.

나치 독일에서 브레히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고백했다면, 네팔의 가난한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는 ‘살아남은 자의 운명’을 노래했다.
그의 말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짜깁기하는 데도 지쳤을 때, 안간힘으로 버티던 두 팔을 탁 놓아 버리고 싶을 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어질 때.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보다 위대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그래,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의리로,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서로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 높은 벼슬을 주며 불러도 응하지 않은 학자들을 훌륭하다고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럽다.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보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가 훨씬 더 어려우니까.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는 집 안에 틀어박혀 시를 쓰기보다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기를 바랐다.

두고두고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의 절창은 모두 세상의 비극에 눈감지 않았던 이 뜨거운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이 아무리 뜨겁고 그 뜻이 아무리 높다 해도 어린 자식이 굶어 죽는 참담한 슬픔과 거듭된 세상의 냉대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으니, 깊은 밤 홀로 깨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뜻을 되새겨야 할 만큼 그의 생애는 외로웠다.

이 시를 쓴 이성선 시인은 평생 설악을 벗하며 가슴 시릴 만큼 맑은 시를 써서 읽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김사인 시인은 아예 이 시구를 그대로 옮겨 적어 시 한 편을 썼으니, "(……)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라고 고백했을 정도다.

나이 먹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고 당신의 불행은 돌고 돌아 내 불행이 된다는 것.

물론 가끔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저놈의 인간이 불행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러나 복수가 복수를 낳아 세상이 눈물 속에 잠기는 끝을 상상하면 결국 기도하게 된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으니 너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너도 부디 무사히 살라.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그날까지.

첫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가 바보 온달이라도 좋고, 달동네 산비탈 셋방에 살아도 좋고, 가끔 전기가 나가도…… 나가면 더 좋다는 것.

둘째, 마냥 좋은 그 시간이 썩 오래가진 않는다는 것. 뭐든 유통 기한이 있기 마련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 풍경도 없는 깜깜절벽 속을 밀감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달리는 그이들에게 이 시를 읽어 주고 싶다.
날마다 어둠에 길을 내는 당신이 있어 오가는 내 걸음이 편안했으니, 고맙습니다.

어떤 아홉수든 아무튼 아홉수는 외롭기 십상이다.
애인도 직장도 없던 스물아홉에도,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던 열아홉에도, 심지어 입이 찢어져 죽었다는 이승복 어린이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던 아홉 살 그때도.

죽음 앞에서 생은 투명해지느니, 시인의 마흔아홉 생을 거듭 살아도 나는 삶의 무상에서 희망을 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얼마나 공평한가!

도서관을 나섰을 때, 이미 해가 저물어 있더군. 어둔 하늘에 상여 꽃처럼 목련이 희게 떠 있는 저녁 캠퍼스를 젖은 눈으로 걸어오며 결심했지. 나는 이 시를 살겠다, 이 역사를 살겠다. 내 스물은 그날 시작되었지. 내 서른이 어땠느냐고, 마흔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내 삶은 그때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렇다. 내가 좋아한다고 나를 좋아하란 법은 없다.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이루어지란 법은 없다.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으니.

그때마다 맘이 쓰리다. 필 때는 질 때를 걱정하고 질 때는 필 때를 놓친 것을 서러워하는 누군가가 떠올라 쉬 버리지도 못하고 안쓰러워한다.

지금의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사소한 일로 핏대 올리기 전에 생각해야지. 혹시 나비를 잡겠다고 총을 들고 설치는 건 아닌지.

빈대 잡으려다 간신히 마련한 초가삼간 태우면 나만 손해.

그래, 웃자. 그냥 웃자. 웃으면 복이 온다니까, 복이 오나 안 오나 한번 웃어 보지, 뭐.

슬픔은 슬픔이 알고 슬픔은 슬픔에 힘이 됩니다. 지극한 슬픔은 지극한 힘입니다.

그녀를 보고 알았어. 남들에게 받은 친절과 칭찬은 금세 잊어버리고 남들이 서운하게 한 것만 두고두고 저금하는 내 기억력, 아주 나쁘구나. 그런 못된 기억력으로는 절대 멋쟁이 할머니는 될 수 없겠지.

벌레가 갉아 먹어 나뭇잎에 구멍이 났는데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것, 한두 번 본 풍경이 아니다. 한데 이 흔한 풍경에서 시인은 벌레 먹힌 "잎들의 신음"을 듣고 "금싸라기" 햇빛에 세상이 환해지는 것을 본다. 똑같이 눈 두 개 귀 두 개가 있어도 나는 못 보고 못 듣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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