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엔 책과 내가 아무런 매개 없이 만날 때 책이 가장 빛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만나는 설렘도 그때 가장 컸지 싶고.

비스듬히 뉜 연필의 심이 종이 위를 슥슥슥 지나간다.
이혜경, 『저녁이 깊다』, 문학과지성사, 2014.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코바야시 타끼지, 서은혜 옮김, 『게 가공선』, 창비, 2012.

"아저씨 감옥에서 나왔죠?"
최제훈, 『나비잠』, 문학과지성사, 2013.

지옥地獄과 감옥監獄 모두 한자로는 옥 옥獄 자를 쓴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천국은 나라 국國 자를 쓴다. 한쪽은 감옥이고 다른 쪽은 나라인 셈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2.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인규 옮김, 『채털리 부인의 연인』, 민음사, 2003.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누구에겐 최고의 시절이 누구에겐 최악의 시절이 되고, 누군가에겐 지혜의 시대가 누군가에겐 어리석음의 시대가 되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건 모든 시대가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 시대’이니까. 다른 이가 아닌 나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간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여러 사람이 동시대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엄청난 모순을 버텨 내야 하는 시간들이니까.

첫눈에 반해 버렸다.
조지프 헬러, 안정효 옮김, 『캐치-22』, 민음사, 2008.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옮김, 『콜레라 시대의 사랑』, 민음사, 2004.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편혜영, 『재와 빨강』, 창비, 2010.

인간에게 언제 재앙이 닥쳐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레엄 그린, 안흥규 옮김, 『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2006.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맞는 위험 같은 건 없다. 경고란 단지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신호일 뿐 대처 방안은 아니니까.

그리고 모든 위험은 다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거나 적어도 다른 재앙을 불러일으키니 세상에 똑같은 위험도 없다.

게다가 위험은 시작되는 순간 더 이상 위험이 아니니 설령 그 위험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겪었노라고 말할 수 없고.

삶과 닮았다. 위험 말이다. 경고와 재앙으로 둘러싸인 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어느 곳에나 있고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니까. 위험과 삶, 아니 위험한 삶.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1999.

우리가 살아온 현실은 언제나 반은 <허구>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오시이 마모루, 『야수들의 밤』, 황상훈 옮김, 황금가지, 2002.

어디 우리가 쓰는 글과 우리가 살아온 현실만 그럴까.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또한 반은 허구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닌가.

나는 누군가가 제멋대로 상상하고 오해하고 믿어 버린 바로 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 하며 답답해하는 나 자신이 제멋대로 상상하고 오해하고 믿어 버린 바로 그 존재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종종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삶을 한탄하지만,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허구 속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기 때문.

무지개 너머에서 전화가 왔다.
윤후명, 『이별의 노래』, 문학사상사, 1995.

세상 사람들이 천국에서 걸려 온 첫 번째 전화를 받던 날, 테스 래퍼티는 차 상자의 비닐 포장을 뜯고 있었다.
미치 앨봄, 『천국에서 온 첫 번째 전화』, 윤정숙 옮김, 아르테, 2014.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09.

이것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게리 슈테인가르트, 김승옥 옮김,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 민음사, 2007.

바람이 사나운 개처럼 컹컹 짖어 댔다.
이승우, 『그곳이 어디든』, 현대문학, 2007.

바람이 대지를 밟고 우우 달려온다.
윤정모, 『그들의 오후』, 창비, 1998.

우리는 사육제의 바람에 실려 왔다.
조앤 해리스, 김경식 옮김, 『초콜릿』, 열린책들, 2004.

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봄 병풍의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마루야마 겐지, 한성례 옮김, 『달에 울다』, 자음과모음, 2009.

바람이 분다. 순간 깨닫는다. 바람은 부는 순간 이미 떠나고 없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 뿐, 아, 바람이구나 하고 느낄 때면 이미 바람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바람이다.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프랭크 허버트, 김승욱 옮김, 『듄』, 황금가지, 2001.

그녀는 무수한 산들이 겹쳐진 산골 좁다란 오솔길 어귀에 숨어 사는 귀신이다.
리앙, 김태성 옮김, 『눈에 보이는 귀신』, 문학동네, 2011.

넓은 무도회장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반가운 모습의 유령들로 가득했다.
시드니 셀던, 김시내 옮김, 『게임의 여왕』, 문학수첩, 2011.

오페라의 유령은 실제로 존재했다.
가스통 르루, 홍성영 옮김, 『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나는 인생의 가장 내밀한 진실을 비빔국수를 통해 배웠다.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창비, 2014.

꿀벌 이야기에서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 이야기에선 돈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커트 보네거트, 김한영 옮김,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문학동네, 2010.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팔아 치웠다.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2010.

가난, 곧 돈이 없어 겪는 궁핍의 본질은 몸과 마음 모두 돈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돈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만 내면 모두 환영하는 대중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간주해야 하오.
헨리 필딩, 김일영 옮김,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 문학과지성사, 2012.

안녕하세요, 서점에서 뒤적거리며 서 계시는 독자 여러분!
요나스 하센 케미리, 홍재웅 옮김, 『몬테코어』, 민음사, 2012.

별일 아니려니 했다.
파트릭 모디아노, 권수연 옮김,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문학동네, 2016.

지금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유르겐 도미안, 홍성광 옮김, 『태양이 사라지던 날』, 시공사, 2010.

하긴 단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없는 때가 있으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문학동네, 2013.

이것은, 아마도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이다.
박범신,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문예중앙, 2011.

나는 다시 상주가 되었다.
이서정,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파란미디어, 2013.

하긴 ‘다시’야말로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부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시’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는 사람들.

새 원장이 부임해 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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