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에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민주주의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뒤 사회정의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헌법이 개정되었다.

자유주의 전통(좌파가 아닌 자유방임주의)은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적 자유주의와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속에서 출현했다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적 지식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철학에도 흥미를 보였고 특히 재화와 용역의 거래에 관심이 많았다

『국부론』 이후로 도덕철학은 한층 과학적으로 경제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거래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이익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스미스는 자유 시장에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즐길 권한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자유와 권위 사이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전통 자유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자유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벤담의 사상은 19세기 사회 개혁에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과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벤담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미적분학’을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옳고 그름을 측정한다.’ 그는 같은 원칙을 정치에도 적용해 ‘모두가 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아무도 한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행동의 타당성은 쾌락이나 고통이 어느 정도 생겨났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상은 유럽 도덕 사상에 영향을 미친, 행동의 동기와 도덕적 ‘정언명령’을 토대로 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 체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벌린은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인 자유에는 위험이 따른다고 보았다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은 폭군이 될 수 있는데 프랑스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대표적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우정을 나누고 후에 결혼을 한 철학자 헤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수호하는 데 큰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영국 철학자들이 계몽주의 시대를 독식하는 동안 1780년대부터 철학은 독일어권에서 더욱 번성하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독일 철학 시대의 출발점을 연 위대한 독일 철학자다.

정반대인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관점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이라는 형이상학을 제안했다

선험적 관념론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할 때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작업이다.

그의 사상은 셸링, 피히테, 쇼펜하우어, 헤겔 등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각각 자신만의 관념론을 발전시켰다

관념론은 또한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 헤겔의 사상을 채택해 유물론적 관점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또한 종교에 대한 비판과 의구심을 증폭시켰으며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선언에 영향을 주어 무신론 철학을 촉발하기도 했다.

말년까지 합리주의자 위치를 고수한 임마누엘 칸트는 스스로 흄의 저서를 읽고 ‘독단’에서 깨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의 진보에도 영향을 받아 경험에 기인해 얻은 증거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우리가 감각을 활용해 세상에 대해 알아 가는 동안 경험 이전에 타고난 이해의 척도인 ‘범주’가 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우리가 이해하고 추론하는 부분의 한계를 찾으려고 했다. 우리는 육체적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음에도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칸트는 물자체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을 분류했다. 물자체인 세상은 우리의 경험과 이해를 넘어 존재하기에 선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이해하는 현상의 세계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경험적으로 실재하고 현상적, 선험적 이상이다.

칸트는 자신의 이론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과학이 현상 세계를 발견하는 동안 경험과 별개인 실체가 항상 우리의 이해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을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를 포함한 종합적인 철학 체계로 발전시켰다

칸트 도덕철학의 초석이 된 것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타고난 선과 악의 개념을 지니며, 자유의지가 도덕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믿음에 있다.

칸트는 전통을 깨고 도덕성이 결과가 아니라 의도나 동기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언가의 옳고 그름을 정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보편적으로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칸트의 관념론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철학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칸트 추종자였던 피히테는 물자체에 대한 개념을 거부했고 외부의 현실은 지각이 창조한 것이라는 완전한 관념론 체계를 제시했다.

피히테는 도덕 자체가 생성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독일 관념론의 시대는 예술에서 낭만주의 운동이 성장한 시기와 우연히 맞아떨어진다. 자연에 대한 매료와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는 과학적인 합리주의와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지만 루소의 자연 상태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관점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 낭만주의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 중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은 자연을 기반으로 한 철학을 발전시켰다.

셸링에게 인간의 창의성은 자연의 발전이 정점에 올랐다는 것을 지각함을 대변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엄청나게 존경했고 현상과 물자체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흡수했다.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를 통해 그는 이 사상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두 가지 별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에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상은 외부의 표상과 내부의 의지로 경험하는 것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게오르크 헤겔은 철학 ‘체계’를 발전시켰지만 칸트의 사상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 사상 속에서 근본적인 오류라고 생각한 부분을 고쳤다.

헤겔은 추상적인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고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식 속에 구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에게 존재는 인식 주체 속 하나의 완전체이며 그 대상인 외부 세계와 동일하다.

헤겔이 지칭하는 정신은 우리의 직관과 자각을 포함해 비물질적인 현실을 아우른다.

헤겔은 또한 경험의 토대는 독보적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범주’에 대한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우리를 구성하는 의식 자체를 믿었고 이는 진화 과정의 일부로 변한다고 보았다.

현실을 역사적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헤겔은 정신이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현실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된 체계가 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모든 생각에는 모순이 담겨 있고 두 반대되는 생각 사이의 대립 관계가 새로운 생각이 출현하면서 해소된다는 것이다.

합은 정이나 반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건의 역사적인 추이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자각을 포함하는 정신이 그 자체로서 더 낫고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헤겔은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며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의식이라 할지라도 정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결과적으로 시대별로 각각의 다른 정신인 시대정신이 존재하며 우리의 사고와 의식 방식도 이 특정한 발달 단계에 있다.

헤겔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완전히 반대되는 철학을 발전시켰다. 관념론자 헤겔이 현실은 궁극적으로 무형이라고 믿는 반면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자로 비물질적인 범주의 존재를 부정했다.

헤겔이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완전한 정신’인 신에게 투영한다고 말하는 반면 포이어바흐는 한층 더 나아가 실제로 우리는 이상을 투영할 가상의 존재를 만들고 이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학은 단지 인류학이며 신의 지시를 따르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미덕의 원천을 탐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포이어바흐의 도덕철학은 신의 덕보다는 인간을 근본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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