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과 권위에 대한 편견이 덜한 로크는 정부가 자율적 자유를 보호하고 시민들이 독재나 비효율적인 정부를 타도할 권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통치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한층 평등주의적인 체계를 제시했다.

문명사회가 권리나 자유가 아닌 개인의 자산을 보호하려 하고 제약과 공정하지 못한 법이 불평등을 키웠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첫 번째 혁명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권력이 의회로 넘어간 영국에서 발생했다.

사회계약론에 매료되어 변화의 필요성을 설명했으며 미국에서는 영국인 토머스 페인이 철학을 정치 행동주의로 바꿔 놓았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모두 계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삶,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상호 유사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다.

이성의 시대 혹은 계몽주의로 알려진 17세기와 18세기에는 종교나 관습적인 지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과학적 추론을 통한 지식이 발달했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 대다수의 지역에서 합리주의라는 철학 사조로 등장했다

데카르트의 분명한 접근 방식은 수학적 방법을 철학적 물음에 접목시켜 철학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적 문제를 수학적 입증을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모든 것들을 배제한 다음 분명한 진실과 수학적 이치 등 확실한 것부터 세워 나갔다.

많은 고대 철학자들이 인체 속 독립적인 ‘영혼psyche’의 존재를 믿었고 대부분의 종교 역시 불멸의 영혼이라는 범주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인물은 데카르트가 처음이었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동물은 단순히 물리적 세상의 한 부분으로 그 법칙에 따르며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동물의 행동을 자의식이나 정신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견해는 동물과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이 없는 기발한 로봇이 등장하면서 더욱 설득력이 높아졌다.

하나의 예시를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추정이다.

상식적으로 모든 인류〔와 심지어 동물까지〕는 내가 가진 의식과 비슷한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을 만큼 충분한 근거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고 우주나 자연도 그렇기에 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로크는 우리가 경험하는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사물의 ‘주요 특성’과 주관적인 ‘부차적인 특징’을 설명한 반면 버클리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전혀 경험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특성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과관계와 세상에 관한 지식의 확실성에 의구심을 품은 흄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에 도전했다. 그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귀납의 문제’는 20세기 칼 포퍼가 해결책을 제시할 때까지 철학자들 사이에서 난제로 남아 있었다. 흄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확실함이 아니라 희망적인 가능성을 다루어야 하며, 관습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흥미롭게 표현했다.

영국 경험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식에 호소하는 점이다. 이 간단 명료한 추론의 전통은 불필요한 문제와 추상적인 부분을 배제하는 오컴의 방식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증거를 토대로 한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식(세상에 대한 우리 경험의 일부)은 우리에게 경험에 모순되어 발생한 기적은 거짓이거나 감각이 잘못 인식한 결과에 가깝다고 알려 준다.

흄은 주변 세상을 살필 때 이성에 의존할 모든 부분을 효과적으로 없애 버렸다.

흄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관습이 이끌도록 내버려 두며 상식으로 보이는 ‘완화된 회의주의’를 옹호했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이성이 아닌 ‘열정’이라고 부르는 감정과 직관에 이끌려 일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흄의 말을 빌리자면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다. 우리는 가끔 잘못된 판단을 하지만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꼭 필요한 욕구를 부정하기보다는 열정을 만족시키는 편을 택한다. 잘못된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에서 이성의 작용에 대한 흄의 회의주의는 그의 관점을 도덕철학으로 한층 발전시켰다.

그는 대다수의 도덕철학자들이 저술을 할 때 객관적인 설명에서 주관적인 설명으로 갑자기 넘어간다고 언급했다.

에이어의 정의주의emotivism는 도덕적 제의는 객관적인 진술처럼 보여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실증주의의 대표 학자는 오귀스트 콩트이며 그는 형이상학적인 예측은 철학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과학적 질의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증주의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점차 세력을 늘려 나갔고 콩트는 과학에 토대를 두고 그 방법론을 다양하게 적용하는 철학의 한 분과인 근대 과학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지식만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오귀스트 콩트에 따르면 이는 비단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콩트는 물리적 세상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듯 사회 역시 눈에 보이는 법칙에 따라 운영되며 주관적인 자기 성찰이나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에 의해 사회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콩트는 또한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분야의 토대를 정립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이 철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관념을 도출한 것이다.

다윈은 기독교인으로 자랐지만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점점 급진적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유지했다. 아이작 뉴턴처럼 그도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선택과 같은 법칙을 만들었다고 믿었지만 그 이후로 더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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