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책임을 지닌 학자 계급이 출현했고 그중에서도 노자는 사회와 정치 조직의 토대가 되는 종합적인 도덕철학을 제안했다. 이 세계관은 곧 도교로 알려졌다.

노자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은 상호 보완하는 상태로 구성된다고 믿었다.

빛과 어둠, 밤과 낮, 삶과 죽음 등 각각은 순환하는 주기에서 서로 발생하며 영원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도를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동을 억제하고 직관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고 유유자적한 삶인 ‘무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노자가 도덕철학의 근간을 형성했다면 공자는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하는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그는 정부가 덕과 선행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당대 관습과는 달리 도덕적 선함은 신이 준 것이 아니며 어떤 특정한 사회 계층으로 제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덕은 배양할 수 있으며 그 모범을 보이는 것이 통치 계급의 역할이라 말했다.

통치자는 자애로워야 하고 그 국민은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 공자는 이 상호 간의 신념을 다른 관계에도 확장해 정이 많은 부모와 순종하는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친구와 동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했다.

인간관계에서 상호 존중 모델에 대한 생각은 공자 도덕철학의 중심이다, 공자는 또한 타인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정의할 때 상호주의를 지침으로 세웠다.

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탄생과 재탄생의 주기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며 신에게 헌신하거나 업보를 깨닫고 법dharma을 통해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얻을 수 있다.

팔정도(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를 따르면 만족한 인생을 살고 윤회의 주기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교회의 교리는 중세 유럽 철학을 주도했다. 기독교는 특히 초창기에 철학적 추론보다는 신념과 권위에 더 비중을 두었다.

교회는 실질적으로 학문을 독점했지만 일부 기독교 사상가들은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철학 요소를 도입했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기독교 철학이 발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시작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철학이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인본주의 관점이 다시 대두되면서 교회 권위자들, 특히 교황직이 위태로워졌다.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핵심인 믿음과 모순되고 인쇄의 발달로 교회는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믿음을, 철학은 추론을 따르지만 종교와 이성은 양립할 수 있고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신학 체계에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하려면 중심 믿음에 모순되지 않는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중세 기독교에서 반복되는 쟁점은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역설에 대해 신이 우리에게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반박했다

신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지만 악을 창조한 것은 아니며 악은 결핍, 즉 합리적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생겨난 선의 결함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 철학의 자리가 생겨났다는 것은 곧 보에티우스의 작품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입증한 셈이다.

스콜라철학은 신학을 가르치고 그 내용을 변증법적 추론으로 면밀히 살폈다.

스콜라철학은 철학 사상을 기독교와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독교 교육과 신학의 뚜렷한 기풍으로 남아 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인본주의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아벨라르는 공통적인 특질이 특정한 상황에 내재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받아들여 보편은 실체가 아닌 개념으로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개념론으로 알려진 그의 철학은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기독교 교리로 융합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안셀무스는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존재를 상상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런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가장 완벽할 수 없고 존재하는 완벽한 것보다 열등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완벽한 존재는 반드시 존재하며 안셀무스의 말을 빌자면 ‘그건 바로 신이고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 중 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는 이 논쟁이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사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중세 기독교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요 업적은 상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합하고 이들을 기독교 교리로 결속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도덕철학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용도로 활용했지만 이를 정치철학에 적용할 때, 인간이 만든 법이 신의 법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두고 의구심을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속적인 사회와 신의 왕국을 플라톤의 세계와 이데아의 관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비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법이 신의 영원한 법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신의 법의 일부인 인간의 행동, 도덕, 덕을 토대로 한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자연법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개념이다. 기독교(와 많은 다른 종교들)는 평화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치적으로 가끔 전쟁이 필요하다.

보편적인 용례에서 ‘윤리’란 우리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방법을 지칭한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엄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채택했지만 우주의 문제에 대한 그의 관점은 교회의 가르침에 모순된다고 보았다. 피에르 아벨라르는 자신의 개념론(우주는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상)에 입각해 실재론(우주는 실재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상)에 도전한 최초의 철학자다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과 같은 13세기 철학자들은 이 논쟁을 더 발전시켜 우주는 실제 세상의 사물의 특성을 언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오컴은 이성적인 논쟁의 토대로 관찰과 경험적 증거를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에 ‘과학적인 방법’이 되었다.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원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면 모든 것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한 설명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적, 경험주의적 철학은 중세 시대 말에 이르러서야 점차 기독교에 통합되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 방식인데, 감각을 증거로 활용하고 논리적인 추론에 기대는 방식이 너무 세속적이라 신비로운 종교적 요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는 개인에 중점을 둔 인본주의에 동조해 개인과 신의 관계가 가톨릭 교리보다 더 상관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서 강조하는 단순함의 가치, 순수함, 겸손함은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철학에서 논의하는 지식은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 주는 ‘훌륭한 삶’으로 가는 장애가 되며 종교적 신념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인본주의 사상은 처음에는 르네상스라는 문화와 예술 운동으로 구현되었지만 과학과 철학에도 비옥한 토대를 제공해 근대 철학과 과학의 시초가 된 18세기 ‘이성의 시대’를 열게 해 주었다.

이슬람교는 당대 기독교와는 달리 학문을 권장했고 종교와 이성적인 질의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과학과 철학, 신학 교육까지 받은 박식한 이슬람 철학자들은 그리스 문헌(대다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을 보존하고 번역했고 인도의 과학과 수학적인 업적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천문학, 의학, 수학, 연금술과 같은 분야가 발전했다. 두드러진 이슬람 ‘철학파’가 생겨났고 주요 인물인 아비센나와 아베로에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슬람교의 신학에 접목했다.

아비센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했지만 플라톤의 사상을 비롯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별도로 무형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이원론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이원론적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고 신체와 정신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도 마찬가지로 분리된다고 주장했다.

11·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아비센나의 신플라톤주의가 이슬람의 주요 철학이 되었지만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가잘리와 같은 강경파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쿠란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이의 제기는 역설적으로 이슬람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본주의는 이후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마키아벨리와 교회 개혁론자들 같은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당시 철학보다는 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키아벨리는 개인의 도덕성과 통치자와 국가의 편의를 구분하면서 이상적인 정치 사회를 이론화하는 일은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통치자는 필요할 경우 항상 폭력과 속임수를 활용해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얻어야 할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실행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고, 『군주론』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을 빌자면 ‘사람이 할 일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닌 것’을 풍자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속 정치적 현실주의에 내포된 메시지 중 하나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이다. 이 말은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도덕철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의도나 목적보다는 결과로서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하게 해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 인본주의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은 더 이상 종교적 권위에 따르는 것이 아니며 선과 악에 대한 사상도 기독교 교리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극단적이지 않다.

유럽 사상 속에 이슬람의 ‘황금시대’가 남긴 유산 가운데 일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관찰, 분석, 분류 방식을 토대로 한 풍부한 과학 연구로 특히 의학과 연금술 같은 분야의 실험에 있어서는 두드러진 이슬람 전통을 보여 준다.

베이컨은 관찰의 과정, 즉 자료를 축적하고 분석하며 가설을 세우고 중요한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방식을 옹호했다. 일련의 사례에서 일반적인 규칙을 도출하는 추론 과정은 근대 과학적 실천의 토대를 형성했으며 증거를 강조하는 베이컨의 방식은 또한 영국의 경험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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