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그 근본에 있어 전반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두 구절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하느님 및 우리 주변의 세상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진술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하느님이 한두 명 미숙한 인간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징벌을 내린다는 것은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당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기 전이었으므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조차 모르던 상태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이야기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관한 것이며 ‘금지된’ 나무의 이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는 사실이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들에게 ‘옳음’과 ‘그름’의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로운 것이냐 지저분한 것이냐, 복종적이냐 아니냐일 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피조물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형상’은 본능에 대해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있다. 우리는 단지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욕정이 치밀 때에도 성행위를 자제할 수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서 본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물들도 힘은 들겠지만 적어도 도덕적 딜레마는 느끼지 않을 생활의 주요 부분들이 인간들에게는 문제성이 있고 종종 고통스런 영역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언젠가는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인간 뿐이다.

동물들도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저항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아무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죽음의 골짜기의 그림자 아래 살아간다.

만일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나쁜 선택도 똑같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진하여 선한 쪽을 선택하여 자신의 고결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동시에 나쁜 선택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에게 선한 일을 할 자유만 있다면 그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선한 일만 하도록 묶여있다면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 곧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은 옳은 일과 그른 일 사이에서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일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좋은 일도 선택할 자유가 없는 셈이다

왜 하느님은 어떤 특정한 진화의 단계에서 도덕적으로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피조물이 나타나도록 하였는지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했고 그 이후로 이 세상에는 수많은 고결함과 수많은 잔인함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자유란, 곧 우리가 이기적이거나 부정직하기로 선택하면 우리는 실제로 이기적이거나 부정직하게 될 수 있으며 하느님은 그것을 막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나쁜 일인지 가르쳐주고 그런 일을 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경우 일어나는 결과를 경험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거나 심지어 주변의 다른 사람을 해칠 때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고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까? 그 한가지 이유는 우리의 인간성이 서로를 해칠 수도 있도록 자유롭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 자유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느님이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를 속일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상처를 줄 수 있으나 하느님은 그 수많은 세월이 지날 동안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어찌 그리 조금밖에 배우지 못했는지 동정과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의 대답은 그 일을 일으킨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종족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하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은 그 행동이 미리 ‘프로그램’되어있지 않은 독특한 피조물이다. 인간이 선함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함은 그가 악함을 선택할 자유도 있다는 의미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성인들이 아무리 그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든, 아무리 나쁜 버릇에 깊이 길들여 있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고집하련다. 만약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만약 우리가 상황과 경험에 얽매여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본능에 얽매인 동물들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창조하고 명령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와 더불어 고난받는 하느님이라는 사상도 이 세상에 소개했다.

떠돌이가 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포로생활을 하는, 자신의 한 자녀가 다른 자녀들에 대해 하는 행위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하느님

나는 그가 나로 하여금 동정과 분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근원이며, 우리가 희생자들 편에 서서 가해자에 대항할 때 하느님도 나와 같은 편이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을 하느님에게 빚지고 있으며 그를 경배하고 그가 명한 일을 할 의무가 있다.

삶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빠지게 되는 최악의 경우는 스스로를 학대함으로써 이미 당한 일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왜 하느님은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고 말할 때 그가 진정으로 요구했던 것은 ─ 신학이 아니고 동정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하느님을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요, 그들이 자기의 신학적 결함을 꼬집어 주길 바라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가 진실로 좋은 사람이요, 그가 당하는 일은 끔찍하게 비극적이고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그는 바랬던 것이다

겹쳐진 비극의 충격 속에서도 욥은 자존심을 지키고 스스로의 선함을 믿으려 했다. 그가 절대로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대한 비판이 그의 원망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그에게 일어나 마땅한 이 운명을 자초한 그의 행실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효과를 낳는다.

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연민의 감정이 필요했던 것이지, 하느님의 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체적 평안과 자기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꾸짖기보다는 감싸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내하고 타인에 대해 경건한 모범이 되라고 요구하는 친구보다는 자신이 분노하도록, 소리치고 울부짖도록 내버려두는 친구가 그에게는 더 필요했다

일이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뭔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더 행복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요소는 발생한 일, 특히 그 일이 나쁜 일일 경우, 우리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모든 재앙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순식간인 듯하다

우리 마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그 사람을 미워했기에 그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계속 믿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것인가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단지 자신들이 피곤하다든지 혹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로 우울할 때면 우리의 기를 꺾곤 했다

자신의 부족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평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하고 우리 사회의 도덕적 성장과 개선에 기여하는 하나의 힘이 된다

우리의 자아는 매우 취약해서 너무도 쉽게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 느끼도록 만드는데, 우리를 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종교의 불필요한 부분이다. 종교의 목표는 사실 우리가 삶에 대해 고통스런 결정을 내릴 때에도 그것이 정직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 스스로 좋은 기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이 한 신체기관에 흠이 있다 하여도 정상적인 95퍼센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주도록 해야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죄의식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러나 어른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비록 도움이 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해도 어긋난 말 한마디가 사실은 모든 것이 내 잘못 때문이라는 식의 생각을 심화시킬 수가 있다.

이혼이나 사망이나 재난으로 상처받은 사람에게 "네가 만약 조금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렇게 나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근거도 없을 뿐더러 잔인하기조차 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조각들을 주워들고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모둔 불운은 우리의 잘못이고, 우리의 실수와 잘못된 행동의 직접적 결과라는 식의 신경증적 감정을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막강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가 저지른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우리는 만약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거기에는 거의 항상 분노가 따른다. 우리가 상처받을 때 화가 나는 것은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서로를 사랑하던 남녀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들은 상처받았기에 화가 나고, 그 분노를 가능한 가장 가까운 목표를 향해 쏟아 붓는 것이다.

질투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다. 질투는 너무나도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뿌리 깊게 닿아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고뇌와 고통은 세상에 골고루 퍼지는 것이 아니라 널리 퍼져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기란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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