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이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면 벌어진 일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
어떤 때는 영악하게도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선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추위’도 ‘열의 부재’상태, ‘어두움’도 ‘빛의 부재상태’에 붙이는 하나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어둠이나 추위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 ‘증명’할 필요가 있는데,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고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며 추위에 얼어죽기도 한다. 그들의 죽음이나 부상이 우리의 알량한 말장난으로 조금도 가벼워질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우리의 영혼이 정의를 너무나도 갈구하기에, 하느님이 우리를 공정하게 취급한다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실존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희망을 붙들어매게 된다. 이 세상 너머 어딘 가에는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리고 ‘이 세상을 일찍 하직한 사람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만나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그 어떤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혜란 우리의 생명이 사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형태로 ─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이 결국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음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하여 이 세상을 최대한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며 여기서 의미와 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비극에 대한 모든 반응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이야말로 그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왜 그가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가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어떤 대답은 하느님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다른 대답은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참다운 감정을 억압한다. 우리는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증오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지나친 처사를 한 하느님을 증오해야만 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고통은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이 하느님이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그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죄의식과 분노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는 우리의 비극을 극복하도록 도우려 하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것일 수 있지 않은가?
이 책은 하느님이나 신학에 대해 요약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연히 거창한 말이나 같은 질문을 교묘하게 반복하면서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니며 다만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은 하느님과 세상의 선함을 스스로 믿으면서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도록 돕는데 삶의 대부분을 바쳤으며, 개인적인 비극을 겪게 됨에 따라 자기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하느님의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 한 사람이 쓴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나는 언젠가 이 책을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되고 믿게 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글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나와 같이 곤경에 빠진 그 누군가를 돕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한 신앙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만 하느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신앙을 지키거나 종교로부터 위안을 받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무조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는 이런 고통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모든 문제는 단 한가지 물음에서 출발한다. 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신학적 대화들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선한 사람이 당하는 불운은 비단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 당사자나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정의롭고 공정하며 가치가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문제로 대두된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선함, 온유함, 심지어 그 존재여부에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의 작가는, 어리석고 조급한 사람이 악한 사람의 번영과 착한 사람의 고통을 보면 악한 사람이 이익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의로운 자가 결국 사악한 자를 따라잡아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의 배경에 있다고 추측되는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이 따라잡을 시간을 늘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설명할까?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미학적 가치에 기여한다고 해서 인간의 고통을 묵과하고 한 개인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태도는, 각자가 지닌 생명의 지고한 가치에 대한 나의 종교적 신념에 비추어 볼 때에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가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린이에게 고통을 가했다면 우리는 그를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 결과가 멋지다 해도 왜 하느님이 초래한 부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가 양해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만약 잘못과 징벌이 서로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면 내가 경험한 비극과 고통은 나의 잘못된 품성을 ‘고쳐주려’ 일어난 것이라 믿는 편이 오히려 더 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욥은 하느님이 공정성이라는 개념보다 우위에 있기에 그토록 막강하고 일반적인 규칙들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하느님의 연민과 신뢰성, 공정성이지 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욥에게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존재하며 그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꼭 공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것이 저자가 하느님을 등장시켜가며 하려는 말의 전부라면 거기에 무슨 새로운 통찰이 있으며, 하느님이 욥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라면 욥은 왜 그토록 송구스러워 했을까?
우리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기대 대신에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고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어쨌든 성서는 하느님이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자로 묘사되지만 어떻게 그들이 애초부터 가난해지고 과부나 고아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저주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도 우리의 자존심과 선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화를 낼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삶의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나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 연민을 하느님의 가르침, 즉 불의에 분노하고 괴로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맞선다는 느낌 대신 우리는 불의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우리를 통해 일하는 하느님의 분노와 일치시킬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울부짖을 때에도 우리는 아직 하느님 편에 서 있고 그는 우리 편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살인이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모독적이며 그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범행 무기로부터 하느님의 지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태초에…."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땅은 아직 형태를 이루지 않았고 모든 것이 어둠을 덮고 있어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하늘로부터 땅을, 바다로부터 마른땅을 구분해 낸다. 이것이 바로 창조작업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잡아내는 것이다.
혼돈은 그릇된 것도, 악의적인 것도 아닌 단지 고약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불규칙하게 비극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함을 믿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녀가 무언가를 잘못한다고 벌을 주면서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해주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책임감 있는 부모의 모습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교훈의 일종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켜야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때 하느님은 그 혼돈으로부터 사물을 정리하고 예전에는 불규칙성만이 존재하던 곳에 질서를 불어넣어 자신의 마술적인 창조작업을 시작한다.
의로운 사람들 중 일부는 그것을 성취하기도 전에 죽고 만다. 혹 다른 사람들은 처음 고통의 기간이 나중 혜택의 기간보다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아, 세상이란 시편 저자가 우리에게 믿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긴 안목으로 상황을 살펴본다면 악인은 잡초처럼 말라죽고 의로운 사람은 마치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번성하리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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