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에게도 종교의 핵심은 정신과 마음이었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2:13 전반)는 말씀에서 그의 예언 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금식과 굵은 베옷의 효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회개와 참회는 결국 마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요엘의 신앙은 야훼에 대한 신앙이 외적·물질적 축복과는 무관하다고 한 욥의 신앙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외적 축복과 내적 축복이 모두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요엘의 예언은 그다지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요엘은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2:2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야훼의 영Spirit이 부어진 결과는 도덕적 신생, 내면생활의 쇄신, 야훼에 대한 깊은 지식의 획득 등 도덕적·내면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야훼의 신은 다만 ‘영적 도취 상태’만을 초래할 뿐이었고, 요엘은 이 도취 상태가 다가올 ‘야훼의 날’에 대한 예고이자, 전조라는 점을 중요시했을 뿐입니다.

모세와 예레미야에게 있어 야훼의 영은 모든 백성에게 야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부여해 그들이 선지자들처럼 도덕적·종교적 진리를 충분히 지니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요엘의 예언에서는 도덕적·내면적 변화가 전혀 부각되고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에게는 영적 깊이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엘은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탁월한 시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요엘」 1장은 『구약성서』 중 가장 훌륭한 문장에 속하며, 요엘의 뛰어난 표현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야훼는 영원한 주권자임에 틀림없으나 야훼의 절대적 주권은 아직 이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그것은 장차 다가올 ‘야훼의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저하게 실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엘 역시 자신이 목격한 메뚜기 재앙을 통해 ‘절망’을 경험하고 ‘야훼의 날’에 온 희망을 걸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요나의 행동에서는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대단히 모순됩니다. 즉 이방인인 뱃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사람이 야훼가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인 개개인에게 사랑을 베풀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 전체, 니느웨 백성 전체에게는 격렬한 증오심, 적개심만을 품었습니다. 오직 야훼의 진노와 심판만이 내려지기를 원했습니다. 실로 기묘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문제, 계층 문제, 통일 문제 그리고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된 인종 문제 등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고귀한 삶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는 태도, 내게 속한 원자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문제의 시작도 끝도 결국은 인간 문제, 개인 문제인 것입니다.

김교신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김교신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共有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 가며’ 성경을 연구했다.

‘땅의 것’이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방식을 사랑함이다. 물질과 지위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에 지식인의 나약함이 끼어들면 신념을 포기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워진다.

김교신 역시 최재서 못지않게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주 예수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땅의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사적 그리스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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