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에스라」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사건이 일어난 지 200년도 더 지난 후에 기록된 문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에스라」는 과거를 지나치게 이상화해 서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에스라는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제2 이사야와 에스겔의 예언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바빌론에서 풀려나자마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성전 재건에 착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예언자의 메시지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형편이 몹시 곤궁했고, 궁핍한 생활을 핑계 삼아 성전 건축에 대한 무관심을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학개는 바로 이 같은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성전 건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백성이 생활고를 겪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이라 보았고, 신앙적 무관심이 계속될 경우 그들의 불행 또한 계속되리라고 보았습니다.
학개의 말은 맨 먼저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학개의 예언을 청종해 즉시 성전 재건에 착수합니다.(1:12)
예언자의 메시지는 나무와 돌로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에는 바빌론 포수 이전의 예언 정신을 특징짓는 죄와 부패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어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학개는 마치 건축물이 종교의 본질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풍깁니다
아모스, 예레미야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한계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견주어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빌론 포수에서 풀려난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에 불과했습니다. 백성들이 만든 것은 하나의 당당한 국가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였습니다
학개가 활동하던 시기에,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작은 공동체의 미래는 성전 건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국가로서의 정치적 소망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제 성전을 중심으로 민족을 넘어 인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정치적 이상이 아닌 영적 소망을 품도록 인도되어야만 했습니다.
학개의 예언으로 자극받고 고무받은 것은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학개의 말에 그들의 양심이 살아 움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제 지극히 순수하고 내면적인 곳에서 새로이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학개의 이 예언은 훗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됩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인자人子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으니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예언은 이미 과거에 성취된 셈입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는 크리스천의 영적인 성전 에클레시아에 임재함으로써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는 예언과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지금 성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셋째, 「요한계시록」에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21:22)라고 쓰인 바와 같이, 학개의 예언은 장차 마지막 날 ‘하나님’과 ‘어린양’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학개의 예언은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상승 곡선을 그리며 영광과 완성을 향해 솟구쳐 날아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의 메시아 예언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그것이 내포한 정치적 성격과 민족적 한계가 철저히 극복, 지양된 가운데 신약시대에 접어들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더욱 철저히, 예언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오바댜」는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 전체 21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바댜란 이름은 ‘야훼의 종’ 또는 ‘야훼를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히브리인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부모의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소망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각 민족에 대한 야훼의 도덕적 심판입니다. 심판의 주요 대상은 에돔이고, 징벌의 이유는 형제국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잔인한 처사 때문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의 날에는 에돔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remnant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었습니다.
에돔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과 증오는 이렇듯 강렬했습니다. 그 적개심이 어찌나 깊었던지, 에돔이 멸망해 없어진 다음에도 ‘에돔’은 이스라엘의 극악한 원수를 가리키는 일반적 호칭이 되었습니다.
오바댜의 예언에서는 놀라운 비전이나 위대한 사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오랜 세월 박해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억제할 길 없는 사무친 한을 대신 표현해 주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의 날과 승리의 날이 머지않아 다가오리라는,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수가 멸망하고 유대인이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심어 준 것입니다.
오바댜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과 이방 민족들을 정죄한 반면, 이스라엘만이 높이 받들어지기를 대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바댜는 흔히 편협한 국수주의적 예언자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바댜의 예언에서는 제2 이사야에게서 볼 수 있는,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 영속적인 요소는 야훼의 나라가 끝내 임하고 말리라는 예언자의 확신과 신앙에 있습니다.
오바댜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국가적 명분보다는 야훼의 의를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언 사상의 본질은 역사 속에 야훼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훼는 세계를 창조한 후 손을 떼고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보며 역사 속에서 인류가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가차 없이 심판과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인, 앗시리아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는데, 이 혼종을 수도 사마리아의 지명을 따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왕국 유다는 앗시리아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기원전 597년에 정복되고, 그 뒤 약 60년 동안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많은 유대인이 유배지 바빌론을 떠나 애타게 갈망하던 조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에게는 일손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이에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돕겠다고 나섰으나 유대인이 이를 거절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러운 피가 섞인 혼종일뿐더러 잡신을 섬기는 족속(「열왕기하」 17:25?34)이라고 죄악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종교적·정치적으로 격리되어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이 세력 경쟁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서 고립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들이 나태와 탐욕의 수렁에 빠져든 것은 그와 같은 여건 속에서였습니다. 바빌론 포수에서 풀려난 후 그들은 우쭐거리며 자긍심에 차 있었습니다. 포수 기간 동안 고초를 당하면서 야훼의 진노를 경험했고, 그로 말미암아 내적인 정화를 경험했으니, 훈련과 규율에서 자부심이 싹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지도자들은 오직 그들 집단만이 참다운 ‘남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 재건 이후에 밀어닥친 좌절과 난관 앞에서 그와 같은 심리 상태는 대단히 부적합했습니다. 성전의 완성과 함께 떠오르던 무지갯빛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고, 야훼의 백성은 여느 이방 민족과 마찬가지로 흉작 등의 자연재해와 이웃 민족의 계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실망은 환멸로 이어졌고, 환멸은 종교적·도덕적 해이를 초래했습니다. 이와 같은 심리 상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사랑과 거룩함을 경멸했습니다. 성전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했고, 감히 야훼에게 더러운 떡과 흠 있는 동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페르시아인 총독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의 말처럼 "그 백성에 그 제사장"이었습니다.(「호세아」 4:9) 이 시대의 제사장도 백성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의 위엄뿐 아니라 최소한의 품위마저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율법을 경멸했고, 백성 가르치기를 중단했으며, 매사를 편파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백성에게도 경멸당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계층에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형제를 배신했으며(2:10) 간음, 위증, 사기, 빈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형편없는 도덕적 타락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로 그들의 결혼 풍습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가장 훌륭하다는 가문조차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그 고장의 토착민들과 거리낌 없이 혼사를 맺곤 했습니다.
참다운 남은 자요, 진정한 이스라엘 가문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이처럼 반이방적인 유대인 및 사마리아인 들과 거리낌 없이 혼사를 맺었습니다. 불안정한 식민지 상황 속에서 그들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부와 권력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태 역시 성전 재건 이후 반세기 동안 크게 쇠락했습니다. 이 상태로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460년경 야훼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예언자 말라기의 입을 통해 발하게 됩니다.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두고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문서 중 다른 어디에도 말라기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말라기」의 편집자가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제목이 누락됐음을 발견하고 3장 1절의 "나의 특사"(말라기)라는 말을 책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로 인해 마치 ‘말라기’라는 인물이 실재했던 것처럼 간주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 본인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예언자는 가난하고 박해받던 집단에 속했고, 당시의 지배계급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를 더 원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언자의 이름은 이 세상에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야훼 앞의 비망록"(3:16)에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를 달리 호칭할 방도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이 책의 제목인 ‘말라기’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말라기의 예언 대상은 두 부류였습니다. 첫째,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죄악에 빠져든 백성, 둘째, 불평불만 속에서 야훼를 섬기던 부류였습니다. 이 두 번째 부류인 불평불만자들은 첫 번째 부류가 향유하는 성공적인 생활을 보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는 느슨하게 나사가 풀렸고, 백성 간에는 냉소적인 태도가 만연했습니다. 이제 말라기의 예언 활동은 과거의 예언자들보다 한층 계획적이고 치밀한 논증으로 바뀔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먼저 진리가 선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첫 번째 단계에서 선포된 진리를 들은 백성의 입장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박이 열거됩니다. 여기서 종종 사용되는 말은 "그러나 너희는"입니다.
끝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앞서 선포된 진리가 철저히 다져집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예언자적 방식이 취해지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예언 방식은 대단히 특이한데, 이를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마치 교사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스바냐에 의해 예언이 묵시적 성격을 취했고, 하박국에 의해 예언이 지혜서의 성격을 취했다면, 이제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은 교육적·논증적 형태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성전에 대한 경시’는 포수 이전의 예언자들이 공격해 마지않았던 ‘광적인 의식 종교’와 근본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의 성전에 대한 태만뿐 아니라, 지적 의무의 소홀함에 대해서도 질책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만군의 주 나의 특사’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의 말은 사제직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배격하는 데 유용합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제직의 본분이 기적적인 은사의 전달에 있다고 보는 견해와 둘째, 사제직을 신비롭게만 여기는 견해입니다.
말라기의 말처럼 모든 사제는 ‘지식의 사제’, ‘진리의 사제’입니다. 지식의 포기야말로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교적인 이웃의 유력한 가문과 혼인하려고 본처와 이혼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라기는 대단히 심원한 예언을 설파했습니다. 이는 그의 예언 가운데 매우 탁월한 부분으로서 그의 시대에 붙여진 율법주의라는 혐의를 벗기는 데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루터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필경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율법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자는 율법을 통해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파급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말라기의 가르침이 얼마나 과장되고 남용되기 쉬었는지는 그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리고 그 후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어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신랄하게 질책한 것도 바로 그 시대에 행해진 종교적 왜곡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과 신약시대의 처음은 이러한 문맥 속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전혀 진지함이 없었습니다. 성전 자체를 경시했으며, 제물을 바치는 데도 지극히 인색하고 기만적이었습니다. 요컨대 이때는 야훼를 빈정거리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